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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Jul 30. 2024

배수아 《작별들 순간들》

최초와 최후가 뒤섞여 만드는 냄새로 가득한 문장들...

  “그 11월에 나는 글쓰기의 기원에 관한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나는 비틀거린다, 라고 나는 대답해야 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공포에 질려 비틀거릴 뿐이라고. 나 자신이 쓴 모든 것에 걸려 넘어진다고. 그것은 밤의 숲에 드러난 뿌리다. 비명을 지르는 물닭이다. 나는 길이 보이지 않는 숲에서 방향을 잃은 채 오직 낙엽을 헤치며 가는 중이다. 그것이 나의 글쓰기이다. 그러나 나는 내 공포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

  내 글은 아무도 모르게 달아나는 중이다. ‘글자 그대로 읽히는 것’으로부터.” (p.49)


  2018년 가을, 저자가 번역한 예니 에르펜베크의 《모든 저녁이 저물 때》를 읽었다. 많은 죽음이 등장하는 소설이었다. 2015년에 읽은 《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은 저자의 몽골 여행기에 근접한 산문집이다. 2014년에는 저자가 번역한 페소아의 《불안의 서》를 샀는데, 침대 옆에서 아주 간혹 조금씩만 읽히는 중이다. 거슬러 올라가 배수아의 소설집 《심야통신》을 읽은 것은 1999년이다. 나는 그해 초겨울 첫눈이 내리는 날에 결혼을 했다. 


  “... 우리는 산책길에 꽃술이 뱀의 혀처럼 길게 나온 푸른 꽃을 발견하고 꺾어 와 화병에 꽂았다. 독일어로 ‘독사의 대가리Natternköpfe’라고 불리는 꽃이다. 초여름, 부드럽고 온화한 날들이 이어졌다.” (p.76)


  배수아의 글을 오랜만에 읽었다. 그리고 저자의 문장에서 건너뛰기의 미학이라고 부를만한 것을 느낀다. 그러니까 위와 같은 문장의 흐름, 산책길에 꽃을 발견하고, 그 꽃의 이름이 독사의 대가리임을 확인하더니, 별안간 ‘부드럽고 온화한 날들’로 건너뛰는 방식을 들여다보면서 살며시 미소를 짓는다. 나는 이런 방식의 흐름을 애써 좋아하는데, 그 유격에서 아주 작고 세심한 긴장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오늘을 슬픔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그는 여름을 열정적으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여름의 빛, 여름의 냄새, 여름의 선언을 열애하기 때문이다. 그 여름이 지나가고 있음을 느낀다. 투야나무 울타리의 쇠 빗장이 덜컹거리는 소리에 귀기울이며 우리는 폭우 속에 앉아 있었다. 젖은 장작을 태우면 벌레들이 기어나온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우리가 잊은 모자가 테라스의 어둠 속에서 젖고 있었다.” (pp.138~139)


  산문집인데 마치 주인공인 듯, 아니 그보다는 주인공의 건너편 손 뻗으면 닿을 만한 거리에 ‘베를린 서가의 주인’이 있다. 자신이 머무는 모든 공간에 그만의 서가를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존재로 그려지는 이다. 산문집의 화자이자 주인공을 저자라고 한다면 저자의 반려인으로 짐작할 수 있는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때때로 등장한다. 산문집의 초반에 구축된 독특한 캐릭터 탓에 주의를 환기시키기에 충분하다.


  “... 테라스 난간에는 여름에 말라죽은 메뚜기, 거미줄, 깨진 찻잔, 녹슨 쇠접시, 양초, 조약돌, 구슬 목걸이, 신문에서 오려낸 시, 개의 해골, 붉은 물감이 말라붙은 붓, 자작나무 장작 한 덩이, 잣나무 열매, 거울 조각 그리고...

  고요. 회색.

  이것은 『파사칼리아』의 첫 문장이다...” (p.193)


  반짝이지 않지만 조각난 것들을 모아본 적이 있다. 눈에 띄지 않으므로 나조차 수집된 것인 줄 눈치채지 못하기도 하였다. 수집벽은 그렇게 사라졌다. 수집의 주체 또한 이미 누추해졌다. 어쩌면 그 후에 남겨진 것이 ‘고요. 회색.’이 아닐까. 기척도 없이 다가오고 감쪽같이 희석되는 것들, 어두운 담에 달라붙는 더욱 어두운 그림자 혹은 사막 한 가운데로 내리꽂히는 추락하는 새의 소멸하는 그림자 같은 것들을 떠올린다.


  “나는 글쓰기의 기원에 관한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나는 최초의 언어를 배운 장소를 생각했다. 그곳은 부엌에 우물이 있는 집이었다. 정원에는 맨드라미가 핀 넓은 화단이 있었고, 비 내린 뒤 마당 한가운데서 나를 바라보고 있던 커다란 두꺼비, 나를 목욕시키고 최초의 말을 가르쳐준 친척 여자가 있었다... 비 내린 뒤, 한 마리 두꺼비가 내 얼굴로 뛰어올라왔다. 친척 여자가 죽었을 때, 나는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 (pp.234~235)


  바로 지금 카눈이라는 이름의 태풍이 아주 느리게 점점 느리게 한반도를 관통하는 중이다. 이미 상처 입은 것들이 난무하고 아직 상처 입지 않은 것들이 숨을 죽이고 있다. 배수아의 문장들은 숨 죽이지만 숨 죽이지 않는다. 자신이 가지 못한 장례식에서 죽음을 느끼고, 사라진 죽음을 배경으로 삼아 어쩌면 삶의 기원을 길어 올린다. 문장의 구석구석에서 최초와 최후가 뒤섞여 만드는 냄새가 난다.



배수아 / 작별들 순간들 / 문학동네 / 251쪽 /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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