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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Jul 30. 2024

안희연 《당신이 좋아지면, 밤이 깊어지면》

길고도 멀리, 잠깐 동안 노을이 있는 저녁처럼...

  “... 귤 먹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을 조금은 알 수 있다. 나는 귤을 하나 집으면 말랑말랑해질 때까지 주무르다 먹는 타입. 귤에 붙어 있는 흰색 줄도 꼼꼼하게 제거하는 편. 그런데 그 흰색 줄, 귤 귤橘 자에 이을 락絡 자를 써서 ‘귤락’이라 불리는, 그게 실은 섬유질덩어리라 떼어내지 않는 게 좋단다. 아무려나 맛있는 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귤. 당신이 궁금하면, 함께 귤을 먹어야겠다는 생각. 그러다 당신이 좋아지면, 밤이 깊어지면, 지금껏 누구에게도 해본 적 없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진다.” (pp.12~13)


  ‘지금껏 누구에게도 해본 적 없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지금 그런 이야기가 있지 않다면 나중에라도 그런 이야기가 생기면 좋겠다. 나는 과일을 즐기지 않는 편이다. 그래도 떠올려 보자면 귤은 포도, 딸기 다음으로 좋아하는 과일(그런데 귤이 과일인가)이다. 생각해보니 ‘지금껏 누구에게도 해본 적 없는’ 이야기이다. 내가 좋아하는 과일의 순위 따위를 물어본 이가 없었다. 아내를 포함해서...


  “그땐 살아 있었던 아빠를. / 이 악물고 운동장을 달리던 엄마를. / 풍금 재시험을 보기 위해 강의실로 들어온 무리 속에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 순간. / 내가 저 먼 우주로부터 전속력으로 날아오고 있었을 때.” (p.23)


  아빠와 엄마가 만나는 때를 풍선처럼 이미지로 띄워 놓고, 거기에 ‘내가 저 먼 우주로부터 전속력으로 날아오고 있었을 때’라고 말을 담았다. 읽고 있자니 그 날아오고 있는 것이 눈에 선연하였다. 그만큼 말의 속도가 빠르고 말의 방향이 정확하였다고 할까. 시인이라는 작가 본래의 속성이 산문의 여기저기에서 말맛을 발하니 읽고 있는 중인데도 입맛을 다시게 된다.


  “... 성격은 변한다 변하지 않는다 논하는 건 공허한 일 같다. 사람마다 특정할 수 있는 성격이랄 것도 없으리라는 생각이다. 한 사람의 몸은 수많은 사람이 거주하는 장소일 뿐, 내 안의 무수한 내가 커졌다 작아졌다 때론 소멸하기도 하면서 나라는 외피를 움직여가는 것일 테다...” (pp.61~62)


  작가의 생각에 크개 동의한다. ‘한 사람의 몸은 수많은 사람이 거주하는 장소일 뿐’이라는 깨달음은 살다 보면 저절로 도달하게 되는 지점이 아니다. 저절로 도착할 수 없는 지점이므로 자꾸 생각하고 돌이켜보고 빗대보기도 하면서 자신을 닦달해야 그리로 움직일 수 있다. 이런저런 곤란한 지점에서 얼굴이 붉어지도록 반성하면서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아야 가까스로 그 근처를 향하여,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얼굴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다. 주로는 얼굴을 벗고 싶다는 생각. 얼굴은 목이라는 벼랑 끝에 위태롭게 놓여 있는 어항 같다는 생각.

  아침저녁으로 비누칠을 해 얼굴을 닦지만 늘 미진한 마음이 든다. 얼굴 안쪽까지 손을 집어넣어 박박 닦고만 싶다. 원래 어항 속 물은 자주 갈아줘야 하는 법인데. 내 얼굴에선 어떤 물고기도 살지 못할 것 같다. 이미 흙탕물이 그득한 상태일지도 모른다. 갈수록 거울 보기가 두려워지는 이유.” (p.99)


  작가는 ‘얼굴을 벗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다는데, 나는 나의 얼굴을 피하고 산 적이 있다. 어릴 때였는데 특히나 거울이 있는 술자리를 무서워하였다. 용케 피해 앉을 수 있었고 덕분에 매일 술을 마셨다. 그때의 나의 얼굴과, 사십대 중반에 병이 시작되고 나서, 지금의 얼굴은 크게 다르다, 달라졌다. 그때의 얼굴을 피하고 산 덕분에 지금의 달라진 얼굴에 어렵지 않게 적응할 수 있었다.


  “노을을 보면 드는 생각; 누가 새의 목덜미를 쥐고 있었나. 피가 안 통할 만큼 세게. 그것이 현실이고 운명이고 슬픔의 끝 같은 데라는 듯 거칠게. 다음은 없다는 듯이. 그러다 제 슬픔에 겨워 손의 힘을 풀었구나. 그제야 핑그르르 도는 피, 저녁.” (p.173)


  힘을 주었다고 힘을 풀었다가, 그 낙차에서 생기는 ‘핑그르르’를 알 것도 같다. 목덜미를 누군가에게 맡겨 놓은 새, 그 새의 목덜미를 세게 쥐고 있는 슬픈 누군가는 서로가 서로를 향하고 있어서 각각이 주체이기도 하고 객체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새인지 새의 목덜미를 쥐고 있는 누군가인지 잠시 골똘하였음이 무안하다. 그리고 나는 노을이 있는 저녁처럼 붉어졌다, 길고도 멀리, 잠깐 동안...



안희연 / 당신이 좋아지면, 밤이 깊어지면 / 난다 / 201쪽 /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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