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녕 《도자기 박물관》

혼란스럽게 통과하였거나 통과 중인 우리들의 어떤 아스라한 시절...

by 우주에부는바람

윤대녕의 소설이 특징으로 삼는 아스라한 삘이 여전하다. 나이를 먹었어도 윤대녕은 윤대녕이어서 독자들의 속마음을 간질간질하도록 만든다. 오랜만에 집어든 작가의 소설집으로 내 마음이 간질간질해지니 윤대녕이나 나나 매한가지다, 세월이 흘러도 쉽사리 나이 들지 못하는 철없음으로 혼란스럽기는... 그렇게 오랜만에 윤대녕스러운 윤대녕의 소설을 읽으면서 가을밤 속으로 설렌다.


「비가 오고 꽃이 피고 눈이 내립니다」.

“... 나는 당시 무청 같은 스물한 살이었고 당신은 스물두 살에 불과했습니다. 흔히 어여쁜 나이라고들 하지만 누구나 인생을 돌이켜보면 무척 불안하고 혼란한 시기이기도 하지요. 짙은 안개 속을 걸어가듯 그 어느 것 하나 뚜렷하게 손에 잡히거나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나이이기에 말입니다.” (p.17) 스물한 살 ‘무청 같은’ 나이에 잠시 스치는 인연이었던 여자는 이제 소설가가 되어 책을 내는 스물두 살이었던 남자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마지막 장에 작가 자신인 듯 소설 속 남자인 듯 써내려간 답장이 인상 깊다. “... 이렇듯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여전히 비가 오고 꽃이 피고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p.34)


「반달」.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누구한테나 고독이고 고통이겠지. 짐승이든 사람이든 말이다. 이 어미도 속으로 저런 소리를 내며 밤새 뒤척일 때가 많단다. 그래도 아까 우리가 보았던 하늘 아래에서 이렇게 생명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게 다 좋은 일 아니겠니? 운명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바로 운명이고 숙명이란다.” (p.56) 악화된 모자간의 이야기인가 했는데, 배 위에서 벌어진 어느 남자와 남자의 어떤 찰나에 대한 이야기인가 하다, 다시금 지나간 흔적을 또다른 흔적으로 덮어 씌우는 운명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라고 정리해본다.


「도자기 박물관」.

표제작이다. 앞의 두 편의 소설과 마찬가지로 흘러간 시간에 대한 되새김질의 이야기이이지만 그 느낌의 둔중함이 천양지차다. “도자기라는 게 모두 불구덩이 속에서 태어났듯이, 나 또한 시뻘건 가마 속에 앉아 서서히 달궈지면서 사기그릇으로 변하는 꿈을 꿀 때가 있어. 저것들과 함께 도사리고 앉아 뜨겁게 아우성치다 점점 말문이 막혀가면서 말이야. 그처럼 불을 견디는 심정으로 살되, 내 삶은 백자처럼 아무 무늬가 없어도 좋다 싶어. 종내에는 그렇듯 하나의 우둔한 형태로 남고 싶을 뿐. 그래서 누군가의 가난한 집 부엌에서 간장단지나 쌀독으로 쓰일지라도 그저 그뿐.” (pp.107~108) 서울로 상경하여 어찌어찌 만난 아내 영숙, 그러한 영숙을 차에 싣고 다니며 장사를 하던 내가 꿈인 듯 눈길을 주었던 도자기들... 그러나 그렇게 헛것인 듯 시선을 주었던 도자기 혹은 자기에 대한 집착이 결국 모든 것을 땅에 파묻는 결과로 귀결된 것은 아닌지...


「구제역들」.

“우리는 언제부터 자신과 닮은 족속들을 만나게 되면 덥석 반가워하는 게 아니라 서로 끔찍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 걸까? 그리고 어느덧 발굽이 갈라지고 무릎이 썩어들어가기 시작하고 여기저기서 핏물이 배어나오고 전체가 하나로 병들어가는 지경에 이른 것일까? ...” (p.150) 구제역으로 나라 안이 한창 방역으로 시끄러운 시기, 나와 동생은 부모님의 묘자리를 미리 보기 위한 여행에 나선다. 그리고 조금은 껄끄럽기 그지 없는 이 형제의 과거사가 조금씩 밝혀지는데...


「검역」.

건강검진을 받기 위하여 병원에 들른 그를 스케치하는 소설... ‘왜 낯선 남녀가 만나 굳이 가족을 이루고 살아야만 하는지에 대하여 그는 때낮은 혼란에 사로잡혀’ 있다고 하는데 그 연유가 투명하지는 않다.


「문어와 만날 때까지」.

“... 나는 내 삶에 있어서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나도 미처 모르는 사이에 세계에서 멀어져 어딘가에 격리돼 있던 시간들을. 언제 어디서 나는 잃어버렸던 세계와 다시 만날 수 있을지……...” (p.220) 아내, 그리고 아내 이전에 만났던 한 여인... 두 사람과의 추억 혹은 기억이 겹치거나 어긋나는 지점에 대한 이야기...


「통영-홍콩 간」.

“홍콩과 통영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놀라울 정도로 닮았습니다. 물론 홍콩의 야경이 더 화려하긴 하지만, 통영엔 운하가 있죠... 주룽반도와 홍콩 섬이 해저터널로 이어져 있는 것처럼 통영과 미륵도가 그렇죠. 통영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많이 들어아 살았던 곳입니다. 따지자면 홍콩도 그런 곳이라 할 수 있겠죠. 두 도시 모두 폐쇄적이면서 동시에 개방적인 분위기가 묘하게 어우러져 있어요.” (p.278) 홍콩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통영으로, 통영에서 홍콩으로 이어지는 길고 긴 이야기의 릴레이... 사랑은 뜻한 바와 언제나 달라서 어느 곳에서 사라지고 어느 곳에서 다시 나타나게 될지 알 수가 없다. 우리 삶의 곳곳에 뚫려 있는 사랑의 웜홀을 통과하는 듯한 이야기이다.



윤대녕 / 도자기 박물관 / 문학동네 / 317쪽 / 2013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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