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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Jul 30. 2024

박연준 《고요한 포옹》

'고요한 포옹'에 이르지 못하여 조용히 사라져가는 슬픔들...

  “무해하게 돋아나 아름답게 존재하는 것. 부드럽고 보송하고 고소한 향내를 풍기는 것. 아첨하지도 않고도 상대에게 원하는 걸 받아내는 것. 오면 가고 가면 오는 것. 마음을 몰라 끝내 마음을 다 주게 되는 것!” (p.21)


  시인의 산문집에는 시인의 마음으로 포장한 무엇들이 자주 등장한다. 시인이 무엇을 바라보면서 받은 느낌과 내가 그 무엇을 향할 때 갖게 되는 느낌 사이에 다른 것보다 닮은 것이 더 많은 것 같아서 좋다. 위의 구절은 바로 고양이를 가리키고 있다. ‘마음을 몰라 끝내 마음을 다 주게 되는 것’이라는 표현이 구절 전체의 마지막 매듭 같은 것이다. 내 마음도 딱 이렇게 묶여 있다. 


  “자신을 한곳에 내버려두고 먼 곳을 다녀오는 사람들이 있다. 너무 멀리 갈 때는 불러 세우기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놀라기 때문에 부르기가 두려운 사람. 그들은 내 앞에 자신을 앉혀놓고 자기를 찾으러 나선다. 이곳에 당신이 있어요. 말해줘도 믿지 못한다. 그는 언제나 자기보다 더 높은 곳에서, 혹은 더 낮은 곳에서 자신을 찾기 때문에 자기와 온전히 포개져 스스로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가는 사람.” (p.35)


  ‘사람’을 가리키는 대신 ‘가는 사람’을 회상하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잘 되짚어 보면 내 주변에도 ‘가는 사람’이 있던 때가 있었다. 나는 그 찰나를 정확히 기억하는데, 그러니까 정확히 기억하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기억하지 않기로 하였는데, 그렇게 여기까지 와버렸다. 나는 이제 ‘가는 사람’을 기억하지 못하고, 혹시 내가 ‘가는 사람’이 아니었나, 아주 한 번씩 의심스럽게 나를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내가 ‘자연’이라 부르는 것 중 가장 신중하고 무해하며 용맹하고 변하지 않으면서 날마다 새로운 건 나무다. 인간이 개입하지 않는 이상 나무는 처음 자리 잡은 곳을 떠나지 않는다. 죽더라도 그 자리에서 죽는다. 나무는 속임수가 없다. 까닭 없는 일을 만들지 않는다. 가끔 궁금하다. 나무도 이곳에서 벗어나 다른 데로 가고 싶을 때가 있을까? 가만히 앉아 이런저런 질문을 하는 내게 나무가 이파리를 흔들어 보인다. 마치 이런 말을 하는 것 같다.” (pp.91~92)


  이건 그러니까 독자인 내가 또다른 독자가 될 수 있는 누군가를 향하여 던지는 떡밥 같은 것이다. 나는 어느 해 봄에 까페 여름의 선배로부터, 봄에 바람이 불어서 나무가 흔들리면 삼투압이 좋아져서 물이 가지 끝으로 잘 퍼져 나간다, 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러니까 나무가 내게 한 이야기는 아닌데, 나는 그해 봄 저 이야기를 나무로부터 들은 것 같기도 하고... 


  “펼쳐진 책은 날아가는 책이다. 머릿속으로, 공중으로, 다른 세상으로, 펼쳐진 책은 힘이 세다. 힘이 세야 날아갈 수 있다. 꽂혀 있는 책은 기도하는 책이다. 읽어주소서. 쌓여 있는 책은 잠든 책이다. 포개져 잠든 동물 새끼처럼 무구하다. ‘잠자는 숲속의 책’처럼 타자에 의해서만 깨어날 수 있다... 빌려준 책은 이민 간 책이다. 돌아올 기약이 없다. 버려진 책은 죽은 책이다. 읽힐 가망이 없다. 고양이가 기대고 있는 책은 ‘묘책’이다. 말릴 수 없다. 고양이에게 넘겨줄 수밖에.” (p.128)


  ‘펼쳐진 책’을 가장 좋아한다. ‘꽂혀 있는 책’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쌓여 있는 책’은 좋은 경우보다 나쁜 경우가 더 많다. 쌓인 책 위에 또 책이 쌓이고 또 책이 쌓이다가 그만 이 세상으로부터 영원히 잊혀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빌려준 책’은 최악이라고 할 수 있다. 애초에 ‘빌려준 책’이 아니라 ‘선물한 책’이어야 했다. ‘버려진 책’은 쓸쓸하다. 내가 나를 버린 것처럼 외롭다. 


  “슬픔은 뜨거운 것이라서 포장하려 하면 포장지가 들러 붙는다. 보기 좋게 세공하려 하면 내용물이 터져 나온다. 무언가 하면 할수록 슬픔은 원래 모양과 열기, 에너지를 잃는다. 이쪽에서 받을 수 있는 건 쭉정이처럼 가느다래진 슬픔의 그림자밖에 없다. 그렇다면 슬픔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생긴 모습 그대로, 들고 있던 형태 그대로 이쪽을 향해 내려두기. 그냥 두는 일이 최선이 아닐까? 두는 일이란 슬픔을 ‘보이는 일’이다.” (p.198)


  나는 이즈음 나의 고통을 꺼내어 ‘보이는 일’로 바빴다. 그렇게 내보여야 할만큼 고통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동안 그만 슬픔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즈음 나를 가장 두렵게 만드는 것은 나로부터 어떤 슬픔의 발원지가 사라져버릴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 어떤 슬픔의 중심에 부모를 향한 마음이 초라하게 자리 잡고 있다. 나는 부모님의 허약해져가는 시간을 수습하면서 그렇게 되었다. 나는 그 시간들을 고요하게 포옹하지 못하였다.  



박연준 / 고요한 포옹 / 마음산책 / 244쪽 /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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