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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Jul 30. 2024

도나토 카리시 《속삭이는 자》

매순간 독자의 예측을 불허하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 일부 심리학자들은 심신이 미약한 사람들을 교묘히 조종하는 능력을 가진 당신 같은 인간들을 ‘속삭이는 자들’이라고 지칭하지... 난 ‘늑대’라는 말이 더 좋은데 말이야······. 늑대들은 떼로 몰려다니거든. 그리고 각각의 무리마다 우두머리가 있어. 그런데 종종 나머지 늑대들은 우두머리를 위해 대신 사냥을 하곤 하지.” (p.596)


  《속삭이는 자》를 읽는 데 열흘쯤 걸렸다. 리뷰를 작성하려고 노트북과 함께 들고 다닌 것이 또 나흘쯤 된다. 저녁에 팔십 분 에어로빅 런을 했고, 이어서 한 시간 수영을 했지만 오늘은 쓰기를 미루지 말자고 굳게 마음을 먹었는데, 빵 몇 조각을 먹으며 채널을 돌리다가 영화 〈한니발〉이 나오는 데서 멈추고 말았다. 방금 한니발 렉터 박사가 메이슨 버저 앞으로 묶인 채 실려 왔다.


  “왜냐하면 누군가를 데리고 나오기 위해 어둠 속으로 들어갈 때마다 다시 빛의 세계로 나와야 하는 이유를 찾으려고 노력해야 했거든요. 아주 강력한 이유를. 그건 다시 되돌아 나오는데 사용할 구명로프 같은 거예요. 거기서 깨달은 건, 어둠이 우리를 부른다는 거였어요. 현기증이 나도록 강하게 끌어당기고 있다는 거. 그 유혹을 떨치기가 너무나 힘들다는 거예요······. 그리고 어둠 속에서 구해야 할 사람을 데리고 나왔을 때, 우리만 빠져나온 게 아니란 사실을 깨닫게 돼요. 항상 그 어둠 속에서 우리를 따라 나오는 게 있었어요. 신발 밑창에 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그 뭔가가. 절대로 떼어놓기 힘든 그 뭔가가.” (p.542)


  <한니발>을 꽤 여러 번 보았을텐데 마지막에 이르면 언제나... 《속삭이는 자》를 읽을 때 꽤 여러 번 <한니발>을 떠올렸다. 그런가 하면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23 아이넨티티> 같은 영화가 연상되기도 했는데, 적당한가, 싶다. 여하튼 읽는 동안에 무척 만족스러웠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도 모두 읽는 데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나, 라고 한다면 이것 또한 글쎄... 


  “모든 살인자들에겐 ‘그림’이라는 게 있다. 만족감과 자부심을 극대화시키는 치밀한 형식의 그림. 가장 어려운 것은 그들이 그려놓은 그림을 이해하는 일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고란 게블러 박사가 수사팀에 투입되었던 것이다. 설명이 불가능한 악이라는 것을 과학이라는 개념의 틀 속으로 밀어 넣어달라고.” (p.17)


  《속삭이는 자》의 저자인 도나토 카리시는 ‘범죄학과 행동과학’의 전문가이고, 연쇄살인범에 대한 논문을 쓰기도 하였다. 이후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다가 이 소설로 데뷔하였으며 곧바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속삭이는 자》는 두 권의 후속작으로 이어졌고, 그 중 하나인 《미로 속 남자》는 작가 자신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졌다. 다른 한 권은 《이름 없는 자: 속삭이는 자 두 번째 이야기》이다. 


  “... 소녀는 그 약속을 마음에 품고 보도블록 위를 걸어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모두 합해 329걸음. 소녀는 주기적으로 발걸음을 세어보았다. 해를 거듭할수록, 그 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소녀가 자라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날도 소녀는 발걸음 수를 세고 있었다. 그렇게 311번째 발걸음 내디딜 때 누군가 소녀를 불렀다... 소녀의 삶이 완전히 어긋나버린 바로 그 시점.” (p.181)


  장르 소설을 읽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어설픈 문장 때문이다. 제아무리 흥미진진한 이야기라도 식상하거나 유치한 문장이 거듭되면 어느 순간 계속해서 읽어낼 힘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런 면에서 도나토 카리시의 문장들은 시작에서 끝까지 일정 수준 이상을 유지하고 있다. 무수히 많은 사건과 그 사건들과 긴밀하게 연관된 등장인물들이 나오는데 그 긴장감 속에서도 느닷없이 돌출하는 문장이 존재하지 않는다.


  “녀석은 여러 명의 아이를 납치한 뒤 하나씩 죽여가면서 단 한 명만 인질로 잡고 있었다. 도대체 왜? 살인 행위 그 자체를 즐기는 건 아니었다. 단지 관심을 끌기 위해 아이를 잡아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향한 관심은 아니었다. 타인을 향한 관심이었다. 소아성애자인 알렉산더 버먼. 자신과 같은 연쇄살인범의 길을 막 밝아가려던 로널드 더미스... 도대체 앨버트 그는 누구일까?” (p.335)


  소설은 한 수감자의 DNA 정보를 얻기 위한 교도소장의 요구가 담기 문서를 프롤로그로 삼고 있으며, 곧바로 어린 소녀들의 한쪽 팔만 묻혀 있는 무덤이 발견되며 소설이 시작된다. 발견된 팔은 여섯 개이고, 이어서 구성된 특별수사팀에서는 마지막 팔의 주인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법의학자인 고란 게블러 박사를 주축으로 한 수사팀에 실종 아동 수색 및 구출 전문가인 밀라가 투입되면서 본격적인 전개가 이루어진다.


  “이런 경우, 몇몇 이유 때문에 고통은 어떤 공간을 남긴다. 슬픈 소식과 그 소식을 전해 듣는 당사자 사이에 횡격막 같은 공간을 만들어내고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줄어들었다를 반복하는 장벽을 형성해서 ‘따님의 시체를 찾아냈습니다’라는 소식이 전달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그 소식은 어느 순간 갑자기 튀어 올라 이상할 정도로 사람을 평온하게 만든다. 무너지기 직전, 체념으로 향하는 짧은 휴식과도 같다.” (p.372)


  시작부터 끝까지가 모두 스포일러라고 할 정도로 소설은 매순간 독자의 예측을 불허한다. <한니발>의 마지막 장면을 보는데 이번에는 반대로 소설 《속삭이는 자》가 소환되었다. 시나리오까지 쓴 작가이니 <한니발>을 보지 않았을 리 없다. 소설 속 밀라 형사가 가지고 있는 어두운 집요함이 클라리스 스탈링의 그것과 꽤 닮아 있다.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없어 안타깝다. 정신 바짝 차리고 읽지 않으면 어떤 사건들의 디테일을 놓칠 수 있다. 독서에 시간이 많이 걸린 이유이다.



도나토 카리시 Donato Carrisi / 이승재 역 / 속삭이는 자 (IL SUGGERITORE) / 검은숲 / 623쪽 / 2011, 2020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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