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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지지 않는다는 말》

동년배 작가의 산문이 제공하는 자기 응시의 기회...

by 우주에부는바람

오래전 작가의 소설 《사랑해 선영아》를 읽고 동년배들의 소설을 읽는 일은 똥개도 자기 영역에서 싸움을 할 때는 50퍼센트는 먹고 들어간다는 투의 리뷰를 적은 기억이 있다. 그러니까 한 살 차이의 작가 김연수가 소설에서 적고 있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무리 없이 소화해내며 저절로 동년배 의식이 생겼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번에 작가의 산문집을 읽으며 다시 한 번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니까 한 시절을 같이 겪고 이제 마흔 줄에 들어선 자로서 가지는 또 다른 동료 의식이 떠올랐다는 이야기이다.

“달리기를 통해서 내가 깨닫게 된 일들은 수없이 많다... 그중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 지지 않는다는 말이 반드시 이긴다는 걸 뜻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깨달음이었다. 지지 않는다는 건 결승점까지 가면 내게 환호를 보낼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안다는 뜻이다. 아무도 이기지 않았건만, 나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그 깨달음이 내 인생을 바꿨다.” (p.8~9)

오래전부터 달리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생활을 해온 것으로 보이는 작가는 자신이 달리기를 대하는 태도 등을 산문집에 실린 여러 편의 글에서 밝힌다. 더불어 그러한 달리기의 여러 국면을 우리들의 삶과 연관짓기를 마다 하지 않는다. 아예 책의 첫머리에 나오는 작가의 말에서 위와 같은 문장을 통해 대놓고 밝힌다. 그렇게 산문집의 두 가지 키워드는 달리기와 인생으로 성큼 집약될 수 있겠다.

사실 요즘 망쳐버린 건강을 추스르느라 오랫동안 잊고 있던 달리기를 시작하였다. (물론 십수 년 이상 지속해온 것으로 보이는 작가의 달리기와 이제 막 세 달쯤 된 달리기에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아직 야외로 나서지 못한 채 작가가 절대로 하지 않는다는 트레드밀 위에서의 런닝에 머물고 있다.) 그리고 이제 서서히 트레드밀의 속도를 높이고, 달리는 거리와 시간을 늘여가고 있으니 작가의 달리기에 대한 애정에 좀더 접근할 수 있다.

“... 달리기를 하는 이유는 절망과 좌절, 두려움과 공포가 거기 없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다. 거기에는 오직 길과 바람과 햇살과, 그리고 심장과 근육과 호흡뿐이다...” (p.252)

또한 실토하자면 그 트레드밀 위에서 나는 가장 집중적으로 사색을 하는데, 그 사색의 대부분은 바로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사실 서른 살 후반과 마흔 살 초반을 거치면서 그 전과는 다른 눈길로 나의 삶을 들여다보고자 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이제는 한낱 얕은 지식이 아니라 누구에겐가 영향을 미치지 못할 지언정 경박하지는 않은 지혜를 거머쥐어야만 하는 나이가 아닌가, 조심스러워진 것도 사실이다. 좌충우돌하던 젊은 시절이라고 해서 단점만 있었던 것도 아닌데, 왠지 조금은 깔보는 태도를 보였다. 나는 내가 그렇게 늙어가는 줄은 모르고, 세상의 많은 일로부터 무연해지고 있음 그저 순순히 받아들였던 것도 같다. 그러니 아래와 같은 문장과 맞닥뜨리는 순간 바짝 긴장하며 반성하게 된다.

“... 이 세계는 고통에 가득 차 있으니 미리미리 그런 고통을 피해서 살아 가고 싶은 생각은, 아직은 없다. 그보다 나는 더 좋아지거나, 더 나빠지는 세계를 원한다. 더 좋은 존재여서 나를 감동시키거나, 더 나쁜 존재여서 내게 분노를 일으키게 만드는 것들로 가득한 세계가 아직은 내가 원하는 세계다. 왜냐하면 그런 세계는 나의 감각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삶의 수많은 일들을 무감각하게 여기는 사람은 순식간에 노인이 될 것이다. 기뻐하고, 슬퍼하라. 울고 웃으라. 행복해하고 괴로워하라.” (p.18~21)

초연하고 무연해지려 한 나의 태도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 중 하나는 급격하게 빨라진 내 삶의 속도때문일 것이다. 마흔을 넘어서면서 나는 급격하게 빨라지는 삶의 시간에 깜짝 놀라게 된 것이다. 도대체 언제 성인이 되느냐며 조바심치던 십대의 시간을 달팽이처럼 흘려 보내고, 독립을 해야 어른인 것이지 고심하던 이십대의 시간을 거북이처럼 흘려 보내고, 자신도 모르게 주변 사람들을 흘깃 거리며 열 맞춰 눈치 보던 삼십대를 절뚝거리는 강아지마냥 흘려 보낸 나에게 사십대의 시간은 절대 잠들지 않는 토끼처럼 빠르고 또 빠르게만 느껴졌다. 나는 그러한 나의 삶의 속도를 느끼는 것이 너무 싫은 나머지 나를 스쳐지나가는 주변의 풍경에 되도록 눈 두지 않으려 작정한 사람처럼 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가가 늙음에 비관적인 것은 아니다. 그가 바라는 것은 (바로 나처럼) 늙음이 젊음을 눈 아래로 두어 깔보거나 젊음이 늙음을 향하여 비아냥거리지 않는 것이다. 작가는 늙음은 젊음의 느린 속도를 느긋하게 바라보고, 젊음은 늙음의 빠른 속도에 사려 깊은 눈길을 보내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늙음이나 젊음이 서로에게 등 돌리는 대신 뜨거운 포옹을 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 샌프란시스코에서 나는 핸드폰을 끼고 배낭을 맨 채 롤러블레이드를 타고 가던 노인을 본 일이 있었다. 잘 타더라. 리스본에서는 젊은 연인들 옆에 혼자 앉아서 우아하게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백발의 할머니도 봤다. 오래 산 사람과 그보다 덜 산 사람이 서로 뒤엉켜 살아가되 오래 산 사람은 덜 산 사람처럼 호기심이 많고, 덜 산 사람은 오래 산 사람처럼 사려 깊은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p.126~127)

마음에 드는 동년배 작가의 산문을 읽는 일이 자기 응시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 응시의 너머에 오랜만에 만난 어린 시절 동창의 얼굴에서 발견한 주름에 놀라 귀가길, 내 얼굴에 바를 에센스 한 통을 사는 사내가 있다. 그리고 이제 그 사내는 스스로를 응시하는 시선의 끈끈함을 세상을 바라보는 일에도 투여해볼 생각이다. 현재의 삶이 달려내는 빠른 속도를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그 속도에 맞춰 주변의 풍경을 확인할 수 있는 정도의 달리기 실력을 갖추기에 너무 늦은 것은 아니다.


김연수 / 지지 않는다는 말 / 마음의숲 / 297쪽 / 2012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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