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경미 외 《이브들의 아찔한 수다》

좀더 은밀한 부분을 좀더 까발려도 좋았을텐데...

by 우주에부는바람

같은 출판사에서 2011년 발간된 남성 작가들의 기획 소설집인 <남의 속도 모르면서>의 여성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젊은 작가 8인의 아주 특별한 섹스 판타지’라는 부제가 붙어 있던 그 소설집의 작가들이 모두 남성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번엔 ‘여성 작가들의 아주 은밀한 섹스 판타지’라는 부제를 붙여 여성 작가들만의 소설집을 기획한 것이다. 물론 기획 소설집이 갖는 한계는 어쩔 수 없어, 각각의 소설이 갖는 완성도는 조금 의심스럽다. 게다가 조금은 낯간지러운 부제에도 불구하고 ‘여성 작가’들의 이번 소설은 어쩌면 여성이 바라본 남성의 섹스 판타지에 가까워 보인다. 뭔가 화끈한 것을 기대하는 사람도, 화끈하지 않더라도 뭔가 심도 있는 여성의 시선을 기대하는 사람도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좀더 은밀한 부분을 좀더 까발려도 좋았을텐데 말이다.


김이설의 「세트 플레이」.

작가 특유의 불온함 그리고 이로 인한 불편함을 이번 소설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고등학생으로 구성된 2인조 꽃뱀(의 남성형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 아줌마들을 상대로 미성년자와의 섹스를 협박하는데, 이 둘의 ‘세트 플레이’는 겉으로는 원활한 듯 보이지만 속내는 그렇지도 않다. 여기에 그나마 성철과 말이 통한다고 생각했던 유선은 기준에게로 넘어가고, 엉망진창 성철의 식구들은 그로테스크하며, 세트였던 기준은 마지막 순간 성철의 뒷통수를 힘껏 후려친다. 어디에 ‘은밀한 섹스 판타지’가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젊은 학생을 찾는 아줌마들에게 있는 것인지, 아니면 가슴은 허락하면서 엉덩이는 허락하지 않는 유선을 바라보는 성철에게 섹스 판타지가 있는 것인지... 이도저도 아니라면 애시당초 섹스 판타지 같은 것은 없고, 그저 구질구질하게 거래되는 섹스만이 있다는 것인지...


이평재의 「크로이처 소나타」.

어쩌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 중 섹스 판타지, 라는 명제에 가장 어울리는 소설이 아닐까... ‘크로이처’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그리고 타락한 결혼 생활과 성애를 비난한 톨스토이의 소설 《크로이처 소나타》를 배경으로 깔아 놓은 채 이뤄지는 남자와 여자의 손길과 마음길의 흔적이 나쁘지 않다. “... 男子는 잘 알고 있었다. 손길이 열리고, 마음길이 열리면 단순한 딜레마 역시 자연이 된다는 것을. 상대의 입에서도 비명이 터져 나온다는 것을. 이제 女子의 몸 안으로 들어가 으르렁거릴 때였다.” (pp.88~89)


한유주의 「제목 따위는 생각나지 않아」.

여자의 은밀한 섹스 판타지가 아니라 남자의 추잡한 집착증에 대한 이야기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녀가 잠결에 무심코 뱉은 누군가의 이름은 내가 세 번이나 집을 나가는 어떤 빌미로 작용하고, 그녀는 그녀에서 그년으로 강등되지만 그녀는 혹은 그년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김이은의 「어쩔까나」.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내용으로 바탕으로 한 가슴 아픈 (?) 사랑 이야기라고나 할까... 부모를 잃은 양반진 규수와 어렸을 때부터 그녀를 돌보았던 노비의 사랑과 결혼과 헤어짐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각설하고 운우지정에 대한 표현만큼은 다른 소설들에 비하여 적나라하다.


구경미의 「팔월의 눈」.

아홉 살 김미진의 군인이었던 아버지는 어느 날 잡혀가고, 스물넷 김미진은 이제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신분상승을 꿈꾼다. 그런 김미진에게 구애를 하는 노동조합의 청년과 김미진 그리고 과거 김미진의 아버지가 잡혀가는 계기를 제공하였던 두 남녀 사이의 연결고리가 무엇인지 도통 모르겠다. 소설 속 김미진은 군데군데가 뜯긴 종이 목걸이를 걸고 있는 것 같다. 남루하다.


은미희의 「통증」.

조르바를 연상시키는 야생의 사내, 그리고 그의 옆에 존재하는 두 명의 여자의 이야기이다. “... 사랑 가운데 가장 치명적인 사랑을 들라면 연민일 것이다. 사랑의 본질은 연민이었고 자기애였다. 열정적인 사랑이야 그 뜨거움이 가시면 시들해지지만 연민은 질기고도 끈질겼다. 상대가 어떤 자세를 취하든, 그 연민은 새록새록 자가발전하며 스스로를 부추겨 세우고, 더 주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그렇게 그렇게 상대에게 흐르곤 했다...” (pp.218~219) 나이든 여자와 젊은 여자의 사이에서 어느 곳에도 안착하지 못하며 바닷속으로의 침잠만을 고집하는 사내를 향한 나이든 여자의 시선이 어딘가 못마땅하다.


가만보면 우리나라 작가들의 성적인 엄숙주의는 여성 작가들에게서 좀더 과하게 도출되는 듯하다. 물론 이것은 사회 전체적인 경향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어디서든 당당하게 음담패설을 내뱉는 남성에 비하여 여성의 입에서 나오는 야한 이야기에는 사회적으로 관대하지 못한 것이 사실 아닌가. 그래서인지 이렇게 멍석을 쫙 펼쳐놓은 기획 소설집에서조차 그 이야기들은 어딘가 엉덩이를 뒤로 쑥 뺀 채 눈만 빼꼼 내어 놓고 눈치를 보는 형국이다. 게다가 그렇게 빼꼼 내어 놓은 눈조차 여성형이 아니라 남성형인 경우가 많으니...



구경미, 김이설, 김이은, 은미희, 이평재, 한유주 / 이브들의 아찔한 수다 : 여성 작가들의 아주 은밀한 섹스 판타지 / 문학사상사 / 254쪽 / 2012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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