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하고 환성적인 일상에 자신만의 리얼함을 세례하는 하루키식 소설의 뿌리
일상 속의 환상이라는 하루키식 모호한 세상의 초창기 버전을 확인할 수 있는 짧은 소설들 모음집이다. 1981년부터 1983년 사이에 작성된 소설들이라고 하니 1982년 출간된 장편소설 <양을 쫓는 모험>과 시기가 겹치는데, 그러고보니 이 장편소설 掌篇小說 모음집의 마지막 소설인 <도서관 기담>에는 양 사나이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 소설만 분량이 조금 다른데, 그러니까 열일곱 편의 장편소설가 한 편의 단편소설로 이루어진 소설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캥거루 날씨」. “우리는 우선 어미 캥거루를 찾아보았다. 아빠 캥거루 쪽은 이내 알 수 있었다. 가장 크고 가장 조용한 것이 아빠 캥거루다. 그는 재능이 말라버린 작곡가와도 같은 표정으로, 먹이통 안에 있는 초록색 잎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그야말로 하루키스러운 문장 작법, 그러니까 ‘재능이 말라버린 작곡가와도 같은 표정’의 캥거루를 확인하고 싶어지게 만드는...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 “꽃가게 앞에서, 나는 그녀와 스쳐 지나간다. 따스하고 자그마한 공기 덩어리가 내 피부에 와 닿는다. 아스팔트로 포장된 길 위에는 물이 뿌려져 있고, 주변에는 장미꽃 향기가 풍긴다.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걸 수도 없다...” 언제나 아련하기만 하였던 하루키의 소설 속 여성 인물들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 아닐까...
「졸립다」. “Mississippi 하고 나는 머릿속에서 철자를 떠올려보았다. s가 네 개, I가 네 개, p가 두 개, 기묘한 단어다.” 하루키가 그렇다고 말하기 전까지는 알아차리지 못하였던 이상한 것들에는 이런 시시한 단어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택시를 탄 흡혈귀」. ‘네리마 지역 번호판이 붙은 검은색 택시’에는 어쩌면 아가씨의 피를 흡혈하기 좋아하는 택시 기사가 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거리와 그녀의 면양」. ‘100마리의 면양’이 있는 마을에는 그 양들의 소독을 위한 약을 준비해야만 하는 그녀, 그 마을을 찾아주기를 바라는 그녀가 있다.
「강치축제」. 인간 세상에 강치 축제를 소개하기 위하여 직접 나선 강치들과 마주치게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거울」. 이쪽의 삶의 세계, 와 저쪽에 죽음의 세계, 유령과 같이 그 양쪽의 세계가 교차한다는 형식의 이야기, 어쩌면 최근의 하루키 소설 <1Q84>가 보여주는 페러럴 월드는 이때부터 준비된 것이 아닐까...
「1963/1982년의 이파네마 아가씨」. ‘형이상학적 발바닥을 가진 여자’ 1963년가 1982년 이파네마 아가씨와 함께 뜨거운 백사장에서 맥주를 마셨다.
「버트 바카락을 좋아하세요?」. “지극히 평범한 햄버그스테이크를 만들겠어요.”라고 편지를 쓴 그녀, 룰을 어기고 시도된 그녀와의 짧은 만남에 대한 반추...
「5월의 해안선」. 어린 시절의 해안을 다시 찾고, 그곳에서 나는 어린 시절에 마주쳤던 많은 죽음들을 떠올린다.
「몰락한 왕국」. 프로그램 책임자인 Q씨와 그러한 Q씨에게 콜라를 부어버리는 여배우와 그렇게 날아온 콜라의 일부에 젖어야 했던 나 사이의...
「서른두 살의 데이 트리퍼」. 열여덟 살로 돌아갈 수 없는 서른두 살의 내가 떠나는 당일치기 여행...
「뾰족구이의 성쇠」. 뾰족제과와 뾰족구이와 뾰족 까마귀... 뾰족구이를 외쳐대는 뾰족 까마귀가 끔찍하다.
「치즈 케이크 같은 모양을 한 가난」. “... 4월에는 철도 파업이 며칠간 계속되었다. 파업을 하면 우리는 정말 행복했다. 전차는 하루 종일 단 한 대도 선로 위를 달리지 않았다. 나와 그녀는 고양이를 안고 선로로 내려가 햇볕을 쬐었다...” 선로와 선로 사이의 케이크 같은 공간에 살았던 가난한 남녀의 이야기...
「스파게티의 해에」. “영원히 삶아지는 일 없이 끝나버린 한 다발의 스파게티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슬프다.” 이 슬픈 생각을 하며 고독까지 떠올리는 하루키라니...
「논병아리」. 일종의 말장난 수수께끼라고 여겨지지만, 논병아리와 암호 사이의 상관 관계를 밝히지는 못하겠고...
「사우스베이 스트릿 - 두비 브라더스의 <사우스베이스트럿>을 위한BGM」. 남캘리포니아 사우스베이, 여자와 탐정과 바다와 45구경 권총과 불량배가 있는 곳... 그곳에서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다.’, 그리고 ‘죽은 시체보다 손수레가 더 정중한 취급을 받는다.’고 한다.
「도서관 기담」. 도서관에서 원하는 책을 찾다가 만나게 된 노인, 그 노인에 의하여 감금된 나는 양 사나이의 감시 하에 책을 읽어야 하고, 적당한 순간 노인에게 뇌수를 빨아 먹힐 위기에 처하게 된다. 하지만 나는 그곳에서 만난 아름다운 소녀의 도움으로 양 사나이를 꼬셔서 탈출을 감행한다.
모호하고 불분명한 세상을 만들고, 그곳에 자신만의 리얼함을 세례하는 하루키식의 작법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는 소설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삼십여년 전에 씌어졌지만 그다지 촌스럽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어쩌면 이 손바닥만한 소설들은 이후 줄기를 뻗고 이파리를 틔우고 열매를 맺게 되는 거대한 하루키 나무의 뿌리 즈음일런지도 모르겠다.
무라카미 하루키 / 임홍빈 역 /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 (カンガルー日和) / 문학사상 / 255쪽 / 2009 (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