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가와 요코 《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

묘하게 읽는 사람의 정서를 건드리는 소년과 코끼리와 고양이의 이야기...

by 우주에부는바람

초등학교 3학년 때라고 기억되는데, 당시의 그 며칠 동안 나는 체스를 익혔고 체스를 두었고 그 뒤로는 체스에 대해 완전히 잊고 지냈다. 군인 아파트에 살고 있었던 나 그리고 나와 같은 학년인 여자 아이는 (무슨 일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양쪽 집의) 부모님들이 집을 비우는 사이 당번병에게 맡겨진 채 한 이틀, 같은 방에서 잠을 자야 했다. 알 수 없는 묘한 감정들이 가득했던 당시의 우리에게는 밤에 우가 함께 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필요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마도) 학교 앞 문방구에서 체스와 관련된 도구들을 함께 샀다.


물론 그럴싸한 것들은 아니었고 종이로 된 체스판과 체스를 두는 방법이 기록된 종이 한 장, 그리고 플라스틱으로 된 (마치 조립식 장난감의 부속품처럼 플라스틱으로 된 원판에서 떼어내야 했던 것으로 기억되는...) 조잡한 것이었다. 우리는 어딘지 불량해 보이는 당번병을 피해 이불이 깔려 있는 방안으로 들어와 함께 체스 두는 방법을 익히고, 그 기술을 이용해서 늦은 시간까지 체스를 뒀다. 그 방법이 맞는지 틀리는지, 그렇게 해서 내가 이겼는지 그 소녀가 이겼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기억이 나는 건, 밤새 잠을 잤는지 아니면 잠을 이루지 못했는지 알 수 없는 그 새벽, 안개가 가득한 놀이터에 함께 나가 소년이었던 나와 그 소녀가 철봉에 매달리는 장면 뿐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갑자기 체스에 대한 소설을 읽게 되었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라는 훌륭한 소설에서 수학 공식과 함께 하는 박사와 그 주변 인물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작가는 이제 <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라는 소설에서 체스를 두는 소년과 그 주변 인물들을 보여준다, 물론 박사가 사랑한 수식처럼 소년이 사랑한 체스와 함께 말이다.


“본 백화점 개업 기념으로 인도에서 찾아온 코끼리 인디라, 그 임종의 땅. 원래는 새끼일 동안에만 빌렸다가 그 후 동물원으로 보낼 약속이었다. 그러나 인기가 워낙 많아 적절한 반환 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너무 커져서 옥상에서 내려갈 수 없게 되었다. 그런 까닭으로 37년간 이곳 옥상에서 어린이들에게 재롱을 피우다가 일생을 마쳤다.”


소설의 시작 부분부터 체스가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태어날 때 입이 붙어 있었고, 그 입을 떼어내는 수술 후에 정강이의 살을 이식하여 입술에 털이 나는 왕따 소년의 관심사는 옥상 위에 올려졌다가 결국 지상으로 내려오지 못한 코끼리 인디라이다. 그러던 소년의 학교 수영장에 한 운전사가 익사하는 사고가 발생하고, 그 우연한 사고를 따라가던 소년은 마스터가 살고 있는 회송 버스에 이르게 되며, 바로 그곳에서 마스터에게 체스를 배우게 된다.


“마스터의 등은 소년에게 승부가 난 뒤의 체스판을 생각나게 했다. 치열했던 싸움의 기억이 사라지고, 많은 말이 모습을 감추고, 얼마 안 되는 남은 말도 바야흐로 사명을 다하고, 그저 서글픈 공동空洞만이 펼쳐진 체스판. 체스는 격렬하게 시작해서 쓸쓸하게 끝난다. 흡사 마스터의 등처럼.”


하지만 소년에게 서두르지 않고 체스를 가르쳤던 마스터는 죽고 (간식을 사랑하였고 멈춘 버스에서 살았던 마스터는 결국 죽음 후에 그 문으로 빠져나오지 못하여 버스를 해체하고 나서야 겨우 시체를 옮길 수 있었다) 이제 소년은 퍼시픽 체스 클럽의 지하에 만들어진 퍼시픽 해저 체스 클럽에서, 나무로 만들어진 인형 ‘리틀 알레힌’이 되어 낯선 사람들과 체스를 두는 것으로 마스터를 추억하고, 마스터의 고양이 폰을 추억하며, 그들의 삶이 고스란히 투여된 체스판 책상을 추억한다.


“... 체스를 두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나 있으니까요. 세계 챔피언을 결정하는 시합 장소에도, 동네 체스 클럽에도, 노인 아파트에도, ‘리틀 알레힌’ 속에도 다들 자기한테 가장 적합한 곳에서 체스를 두는 겁니다... 전 작기 때문에 인형에 들어가 있는 게 아닙니다. 체스판 밑에서만 체스를 둘 수 있다 보니 어느새 작아졌을 뿐입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체스판 밑이 제가 있을 곳인 겁니다.”


그 사이 소년은 자신의 집 벽에 갇힌 채 죽었다고 믿은 마리를 체스 클럽에서 만나고, 그녀를 사랑하였으나 그녀를 곤경에 빠뜨려 그녀와 헤어지게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노인 요양 아파트에서 자동체스인형 ‘리틀 알레힌’이 되어 생의 마지막 순간을 보내는 노인들의 체스 상대를 하며 보다 평안한 시간을 보내게 되지만 결국 이 모든 것들을 뒤로 한 채 숨을 거두고 만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에 비하여 어떤 긴박감은 부족하지만 소설을 읽는 내내 스산한 기운은 가득하였다. 옥상에서 생을 마감한 코끼리 인디라, 소년과 함께 체스판 아래에서 함께 하였던 마스터의 고양이 폰, 소년의 아름다운 체스를 기록하였고 마지막까지 소년과 편지로 체스를 주고 받았던 마리에 이르기까지 어두운 매력을 지니고 있는 상징물들이 가득하다고나 할까.


존재하였지만 그 존재의 흔적이 투명에 가까운, 그래서 아는 사람은 강하게 알고 있지만 모르는 사람은 그저 투명하게 통과할 뿐인, 우리들 인생에서 한 번쯤 스쳐지나갈 법한, 그러니까 내 어린 시절 함께 체스를 두었던 그 소녀와 같은, ‘리틀 알레힌’이라고 명명되었던 한 소년의 이야기는 어른이 읽는 동화로도 보이는데, 어쨌든 묘하게 읽는 사람의 정서를 건드리는 힘이 있다.



오가와 요코 / 권영주 역 / 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 (猫を抱いて象と泳ぐ) / 현대문학 / 370쪽 / 2011 (2009)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무라카미 하루키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