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으로 시야가 넓어질 때, 융숭한 속으로도 시야가 깊어진다...
“... 표현하는 일은 남들보다 뛰어난 사람만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적잖은 오만이다. 누군든 자기 그릇에 맞추어 표현하고 싶은 것이 있고, 그것은 그것대로 존중되어야 한다...”
젊은 시절의 후지와라 신야가 패기로 가득차서 포효하듯 짧고 굵은 문체로 세상을 호령하였다면 최근 발표된 이번 산문집은 나지막하게 사람 사는 일의 우여곡절을 적어내고 있다. 뒤통수를 가격하는 듯한 임펙트는 없지만 실려 있는 열 네 편의 글 하나하나가 때로는 애틋하고 때로는 안타깝고 대부분 진솔하다. 후지와라 신야 자신의 문하생으로 들어왔다가 질타를 당해 나갔던 한 사진가와 무명 모델 사이의 공감대를 기록하고 있으며, 그 무명 사진가의 능력을 폄하하였던 자신을 오히려 질타하는 듯한 <수국이 필 무렵>을 비롯한 글들을 대략 정리해보자면 이렇다.
무명의 사진가와 무명의 모델 사이에 극적으로 이루어진 공감의 이야기 <수국이 필 무렵>, 알람 시계 소리와 함께 이루어진 편의점 아가씨와 손님 사이의 소통의 이야기 <고로케 샌드위치와 오르골>, 인터넷 카페에서 만난 여자와 이루어진 마음의 교류의 이야기 <코스모스 그림자 뒤에는 늘 누군가 숨어 있다>, 다라를 다친 갈매기 그리고 도메 할머니와 떠돌이 개 사이에 이뤄진 평화로운 공존의 이야기 <바닷가의 도메 씨와 목걸이와 제로>, 졸지에 아내 살해범으로 몰린 한 사내가 알게 되는 진실의 이야기 <오제에서 죽겠습니다>...
“... 죽음이 다가오려고 할 때, 인간은 다른 사람의 언어로, 혹은 스스로의 생각으로 이 세상의 미련을 하나하나 떼어냄으로써, 죽음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생겨, 날붙이나 약물을 사용하지 않고도 스스로의 생명을 마감할 수 있다고 나는 믿어. 어머니의 죽음을 보고 그렇게 생각하게 됐지. 죽음이 사람의 생명을 사로잡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명이 죽음을 사로잡는 거라고. 그리고 그때 몇 방울의 물은 이 세상의 감로이고, 그 감로를 마심으로써 각오가 생기는 것은 아닐까, 하고.”
살인범으로 몰린 자신의 친구를 변호하며 동시에 자신의 어머님의 죽음의 순간을 떠올리는 후지와라 신야의 말에 고개 끄덕이게 된다. 죽는 자가 마시는 마지막 물 한 방울의 이야기가 그럴싸한 것이다. 계속해서 카페 메구미의 특별한 도자기잔의 주인인 두 부부를 상상하는 <작지만 이곳에 행복이 있기를>, 어느 날 우연히 지하철의 반대쪽을 바라볼 때 발견한 수 있는 것에 대한 이야기 <당신의 전철이 다른 방향을 보았을 때>, 어머니의 무덤에 매해 꽂혀 있는 꽃의 진실에 대한 이야기 <누가 바친 꽃입니까?>, 자신이 소흘히 했다고 여기는 그들을 대신하여 소녀들을 살피는 정신과 의사의 이야기 <거리의 소음에 묻혀 사라질 만큼 작고 보잘것없는 것>, 도쿄에서 지낸 1년의 시간 동안 유리가 얻은 것과 잃은 것의 이야기 <고마워! 도쿄>...
“쓰고 싶은데도,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여력이 없고, 목욕탕에 들어가 머리를 감고 나면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간 듯 늘어져버려요. 일기를 쓰지 않은 날은, 그 부분만이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처럼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아요...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 날들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결국 그것은 그녀가 스스로 호흡하지 않고, 자신의 모습으로 살지 않았다는 것이리라. 일기를 쓰지 않게 된 것은 단지 피곤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모습으로 살지 않았기에 ‘기록해야 하는 자신의 모습이 없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도쿄에서 보낸 일 년 동안 계속해서 쓰던 일기를 쓰지 못했다는 유리는 다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지만 그렇게 돌아간 고향은 아마도 자신이 떠나오던 순간의 고향과는 또 다른 의미로 돌아오리라 여기게 될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어서 도시의 일반인으로 살아가는 그가 발견하였던 도시 속의 새로운 공간의 이야기 <세상에 단 하나뿐인 수첩에 쓰여 있는 것>과 스페인으로의 마지막 여행 중에 화가가 만난 한 소녀와의 이야기 <예순두 송이와 스물한 송이의 장미>가 실려 있다.
“나는 내 인생에서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이루어왔어. 하지만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이루어지지 않는 희망도 있다는 걸 알았지. 자신의 행복에서 한 발짝 물러서는 것이 타인의 행복이 된다는 것을. 그것은 슬픈 일이지만 인간으로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지. 신도 그러길 바랄 거야.”
스스로를 행복으로 조금 떨어뜨려야 타인의 행복을 만들어줄 수도 있다는 깨달음에 이르는 노화가의 이야기도 감미롭다. 그리고 죽기 위한 여행의 여정에서 마주친 선배 자살 시도자와의 우연한 만남의 이야기 <자기 손금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불행하다>, 작가의 존재를 알아봐주었던 첫 직장에서의 상사를 죽음 후에 다시 알아보게 될 때의 이야기 <외로운 사람은 외로운 그림에서 위로받는다>가 그 뒤를 잇는다.
후지와라 신야는 이야기가 넘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동시에 그의 광대한 경험이 인간의 바깥을 향한 시야의 확대로 이어짐과 동시에 인간 존재를 향한 시선의 깊이로도 이어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산문집이기도 하였다. 삶 또한 여행이라고 한다면, 작가가 세상의 구석구석을 방랑하며 보았던 사람들은 동시에 작가가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방랑을 하며 보았던 사람들이기도 하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그의 사람 경험이 부럽다.
후지와라 신야 / 강병혁 역 / 돌아보면 언제나 네가 있었다 (コスモスの影にはいつも誰かが隱れている) / 푸른숲 / 235쪽 / 2011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