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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Jul 31. 2024

기리노 나쓰오 《품는 여자》

메시지 전달을 의도하며 창작해낸 스테레오 타입의...

  《품는 여자》는 여자 대학생인 나오코를 주인공으로 하여 진행되는 일종의 성장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나오코는 대학생이 되었지만 마작방에 들러 마작을 하거나 친구가 일하는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것으로 허송세월 하고 있을 뿐이다. 좋아하는 남자의 방에 들러 섹스를 하고 하룻밤을 보내기도 하지만 의외의 남자와 함께 밤을 보낸 다음 입을 다물어 줄 것을 부탁받기도 한다. 


  “뭐랄까, 나는 타인의 악의에 기가 꺾여. 아아, 얘가 지금 나한테 상처를 주려고 이런 말을 하는구나, 그게 느껴지면 그 악의에 힘이 쫙 풀려서 말을 할 수가 없어. 어디 한번 해보자는 식으로 같이 입씨름하고 싶지는 않은데 시간이 지나면 억울해지는 거야. 이럴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 (p.39)


  좋아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와 있는 장면을 보아도, 원나잇을 한 남자로부터 비밀 엄수를 부탁받아도, 자신이 여러 남자와 잔다는 사실로 인해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도 나오코는 즉각적인 반박의 말을 던지지 못한다. 반면에 나오코가 어느 정도 동경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즈미는 조금은 다른 면모를 보인다. 하지만 이즈미 또한 옛 남자 친구의 자살이라는 사건을 겪으며 무너진다.


  “죽이고 죽는다. 무심결에 불온한 말이 튀어나올 정도로 ‘당하면 그대로 갚아준다’는 식의 폭력의 사슬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건 그 목적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학생은 전면적으로 패배했다. 60년 안보투쟁도 그렇고, 70년 안보투쟁도 그렇다. 바꾸려는 마음이 있어도 미국을 추종하고 복종하는 상황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무력감만이 몸을 짓눌렀다. 짓밟히고 비웃음 당하는 억울함을 어른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나오코는 생각했다.” (pp.114~115)


  사실 소설이 출간된 것은 2015년이지만 소설 속의 시대적 배경은 1972년이다. 소설은 네 개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각의 챕터는 1972년 9월에서 1972년에서 12월까지이다. 그리고 1972년은 일본 학생 운동 그룹인 적군파의 몰락을 이끈 연합적군의 ‘아사미 산장 사건’이 일어난 해이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이즈미의 남자 친구도, 린치 사건으로 인하여 사경을 헤매이게 되는 나오코의 오빠도 이러한 적군파 분파의 일원이었다.


  “나오코는 친구라고 생각했던 남자들에 대해 강한 분노를 느꼈다. 또 그런 천박한 험담을 그대로 전하는 가와하라 준코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동시에 나오코는 그 분노를 덮어버릴 정도의 깊은 슬픔 속에서 갈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었다... 왜 남자는 여자를 깔봄으로써 자신의 성性을 이렇게까지 추악하게 일그러뜨리는 걸까. 이래서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남자들과 함께 투쟁할 길이 없었다. 그리고 대등한 연애도 할 수 없었다.” (p.190)


  그렇게 소설은 나오코(그리고 이즈미)라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움과 동시에 그 반대편에 (1972년의 가장 큰 사건이며 어쩌면 이후 일본 사회가 지금과 같은 보수화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단초가 된 아사마 산장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일군의 남성들을 자리잡도록 만든다. 나오코의 오빠와 이즈미의 남자 친구는 죽고, 나오코와 이즈미는 남아 살아간다. 번역된 소설에는 ‘안기는 여자에서 남자를 안는 여자로’라는 부제가, 충실하게도(?) 달려 있다.


  “... 남자는 섹스만 할 뿐 힘든 일은 하나도 겪지 않아요. 그러면서 우리들로부터 낳고 낳지 않을 권리조차도 빼앗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애 낳는 기계가 아닙니다. 인간입니다, 여자입니다. ‘안기는 여자에서 안는 여자로’라는 여성운동의 슬로건이 있습니다만, 그것만으론 부족합니다. 적극적으로 안는 여자의 주체적 권리를 지금부터 빼앗아와 강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p.194)


  소설이 마냥 흥미로운 것은 아니다. 사십여 년 전을 시대적 배경으로 삼은 여자 주인공의 각성은 뜬금없어 보인다. 기리노 나쓰오의 소설을 흥미롭게 읽고 있는 중인데, 미스터리 소설이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범죄 소설 (《부드러운 불》, 《아웃》, 《그로테스크》)에 비해 작가가 어떤 메시지 전달을 의도하면서 창작해낸 《일몰의 저편》이나 이번 소설인 《품는 여자》는 덜 매력적이다.



기리노 나쓰오 / 김혜영 역 / 품는 여자 (抱く女) / 문학사상 / 349쪽 / 2017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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