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리즘의 향연이 잔뜩 수척해지니 낙인 찍힌 주인공의 얼굴도 무덤덤하게
작가의 전작 <은밀한 생>으로부터 받은 난해한 감명이 적지 않아, 오래 전 구입하였으나 지금껏 미뤄오다 이제야 읽게 되었다. 작가가 보여주는 아포리즘으로 가득한 에세이 소설의 특징은 전작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전작이 음악을 기조로 하는 반면, 이번 소설은 미술 그 중에서도 판화를 기조로 한다는 차이는 있다) 조금은 조용한 곳에서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스스로에게 잔뜩 몰입할 수 있을 때 읽으면 나쁘지 않겠다.
“.. 질료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하늘이야. 하늘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생명이지. 생명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자연이고. 그러면 자연은 자라서 각양각색의 형태들로 모습을 드러내네. 그 형태들은 자연이 품고 있던 이미지라기보다는 공간을 휘저으면서 고안해낸 이미지들이야. 우리의 육체도 자연의 빛의 도움으로 시도했던 하나의 이미지일세.”
그러니까 판화 작업을 하는 주인공 몸므가 소설 속 그륀하겐이라는 이로부터 듣는 저런 대사를 음미하기 위해서는 독서 중의 번잡스러움을 최소한으로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예 스토리가 없는 소설은 아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몸므라는 인물로, 그는 1617년 파리에서 태어났고, 이후 폴랭, 툴루즈, 브루게를 거치면서 여러 명의 도제로부터 판화의 여러 기법을 배우는 중이다.
그러던 그가 1639년 이십대 초반이던 브루게에서 머무는 동안 그 지방의 판사의 딸인 나니와 열여덟의 처녀 나니와 사랑에 빠지면서 크게 요동을 치게 된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고 육체적으로도 매우 가까워지지만, 결국 두 사람이 한 침대에 있는 것을 목격한 그녀의 약혼자는 몸므의 얼굴에 질산을 뿌림으로써 그에게 평생동안 씻겨지지 않는 흉터를 남긴다.
“... 몸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장 비속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매우 섬세한 기법으로 그리는 화가들의 유파에 속했다. 이를테면 거지, 농사꾼, 개흙 채취꾼, 그리고 대합류나 쌍각조개, 게, 반점이 있는 농어를 파는 어물 장사꾼, 신발을 벗는 젊은 여자, 옷을 걸치지 않은 채 편지를 읽거나 사랑을 꿈꾸는 젊은 여자, 시트를 다림질하는 하녀...”
이후 몸므는 자신의 일생의 여인 나니를 남겨 놓고 도망치듯 브루게를 떠나게 되고, 세상을 떠돌며 점차 자신의 예술 스킬을 발전시켜 나간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마리 에델이라는 여인을 만나게 되지만 그녀를 향한 사랑은 결국 거절당하고, 그 사이 자신을 그대로 닮은 청년 그러니까 어쩌면 나니와 자신 사이에서 비롯된 청년일 수도 있는 방라크르와 만나게 되지만 곧 헤어지고, 결국 지인들과 함께 하던 위트레흐트에서 1667년 생을 마감하게 된다.
“어떤 나이가 되면, 인간은 삶이 아닌 시간과 대면하네. 삶이 영위되는 것을 더는 볼 수 없지. 삶을 산 채로 집어삼키는 시간만 보이는 걸세. 그러면 가슴이 저리지. 우리는 나무토막들에 매달려 이 세상 구석구석에서 고통을 느끼며 피 흘리는 광경을 조금이라도 더 보려고는 하지만 그 속에 떨어지지는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네.”
태어나서 줄곧 떠돌았고 한 여성을 사랑하여 스스로의 얼굴에 판화와 같은 흉터의 낙인이 찍혔고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을 수 없는 소재들을 선택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으로 예술 활동을 하였던 판화가 몸므는 그렇게 생을 마감하였고, 1617년에서 1667년까지의 길지 않았던 그의 삶은 아래와 같은 몇 개의 문장으로 정리될 수 있겠다.
“로마 성도(聖都)의 시민인 판화가 몸므는 폴랭에게서 소묘를 배웠다. 카드 제작업의 기초와 음각술은 툴루즈에서 개신교도 뤼스에게서 배웠다. 동판 선각술과 에칭 기술은 브루게에서 요한 헴케르스에게서 배웠다. 자연의 풍경을 새기는 방식은 그가 로마에 와서 클로드 줄레의 작업실에 있을 때 배웠다. 그는 침착함과 인내심을 요하는 예술에 종사할 운명을 타고났다. 얼굴은 질산으로 화상을 입었다. 그는 채색을 전혀 하지 않았다...”
일반적인 소설의 틀을 벗어나 있으니, 당연하게도 일반적인 소설이 주는 재미는 주지 않는 작품이다. 또한 <은밀한 생>으로부터 받을 수 있었던 아포리즘의 향연도 부쩍 수척해진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 대상을 수상한 작품이라고 하는데...) 사실 읽고 나면 온 몸에서 힘이 빠지는 듯하니, 그것은 어쩌면 그가 추구한 판화 예술의 세계가 가지는 '침착함과 인내심'으로부터 기인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파스칼 키냐르 / 송의경 역 / 로마의 테라스 (Terrasse à Rome) / 문학과지성사 / 179쪽 / 2002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