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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Jul 31. 2024

기리노 나쓰오 《부드러운 볼》

명확한 사건 해결을 포기함에도 멈출 수 없었던 재미...

  감당하기 버거운 상황이 연거푸 밀어닥치면서 책읽기가 더뎌졌다. 허세일 수도 있지만 활자중독이 있어 읽기를 멈추지는 못한다. 다만 이 책(크리스티앙 보뱅의 에세이 같은 소설 《가벼운 마음》) 저 책(진은영의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을 읽다가 중도에 포기하고 만다. 과거에도 그런 때가 있었는데, 극심한 스트레스로 삼 일을 잠들지 못하면서도 각성되어 있던 그때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끝까지 읽고 나서 다시 본래의 책읽기 궤도로 돌아갈 수 있었다.


  “자신의 이야기다. 자신의 어릴 때와 꼭 닮은 유카의 얼굴을 보며, 아이가 시간을 데리고 온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지나간 시간이 여기에도 나타난 것이다. 카스미는 허탈했다.” (p.112)


  어쩌면 그때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 역할을 지금 기리노 나쓰오의 소설이 하고 있다. 나는 연거푸 기리노 나쓰오의 소설을 읽고 있는 중이다. 《부드러운 볼》은 미스터리 범죄 소설의 외양을 띠고 있다. 주인공인 카스미는 다섯 살인 딸 유카를 잃어버린다. 그리고 소설이 진행되는 내내 유카를 찾아 헤맨다. 엄마인 그녀가 딸을 포기하는 일은 기대하기 어렵다, 뻔하다.


  “꿈을 꾸지 않게 되었다. 잠은 언제나 갑자기 찾아오고, 마치 짧은 죽음을 거쳐 이 세상에 되돌아온 듯이 모두 잊고 눈을 뜬다. 매일이 이런 반복이었다. 수면제 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막상 꿈을 잃고 보니 자신이 텅 비고 얄팍한 껍질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뿐인가, 눈을 뜨고 있을 때조차 현실인지 꿈인지 알 수 없게 될 때가 있다.

  사고는 물의 흐름과 비슷하다. 물은 여기저기로 흘러가면서 끊기기도 하고, 모이면서 기세를 더하기도 하고, 탁하게 고이기도 한다. 꿈속의 공포와 기쁨과 신기함. 꿈의 내용은 가느다란 물길에 대한 기억이었다. 꿈이 있기 때문에 현실은 확고하고 흔들림이 없었다. 지금의 자신은 양 기슭에 콘크리트를 발라 만든 수로를 따라 얌전히 흘러가는 물이다. 자유롭게 흐르겠다는 의지 따위는 가질 수 없는 물. 아무 생각 없이 정해진 일들만 소화시키는 따분한 나날들. 따분한 현실과 꿈의 상실이 보기 좋게 나란히 흘러가고 있다. 이 아침에 눈을 뜨는 것 역시 꿈이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다.” (pp.174~175)


  하지만 《부드러운 볼》은 어느 순간 여느 미스터리 범죄 소설과 확연히 다른 궤적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전직 형사이면서 가망 없는 병으로 죽음을 앞두고 있는 우쓰미가 등장하면서 부터이다. 유카를 잃어버리 되는 상황의 기저에 카스미와 이시야마 사이의 지근거리 불륜이 존재하는데, 이런 전형적인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되는) 밑밥이 깔려 있어 이후의 진행이 더욱 신선하게 다가오는 것도 같다.  


  “딸이 태어나면 카스미라는 이름을 붙여주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카스미(霞)’라는 말이 좋았기 때문이다. ‘카스미’라고 하면 봄 끝의 보드라운 구름이 떠오르며 마음이 평온해진다. 그런데 나는 진짜 ‘카스미(봄안개)’를 아직 본 적이 없다. 이 지방의 봄은 눈이 남아 있어서 춥다. 어떤 때는 햇빛이 쏟아지기도 하고, 마음이 우울해질 정도로 무겁게 구름 낀 날이 계속되기도 하는 불안정한 날이 많다. 그러고는 급속도로 여름을 향해 간다. 그러니까 ‘봄안개가 깔린 날씨’라는 걸 한번 천천히 음미해 보고 싶은 게 늘 소원이었다.” (pp.464~465)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딸을 4년 동안 찾아다니는 카스미에게 그저 성공만을 목표로 살았던 전직 형사 우쓰미가 손을 내민다. 형사들에게 탐탁치 않은 감정을 지니고 있던 카스미는 처음에는 이를 거부하지만 어느 순간 죽음의 그림지가 짙게 드리워진 그의 손을 굳게 잡는다. 이제 두 사람이 의기투합 하였으니 독자인 나는 더욱 호기심 가득한 눈을 반짝이며 기대를 갖고 책을 읽어나간다. 


  “... 우쓰미는 거친 숨을 토하며 계속 눈물을 흘렸다. 슬퍼서 견딜 수 없었다. 카스미가 손을 잡아준 것 같은데, 우쓰미는 이미 카스미의 손 감촉도 얼굴도 알 수 없었다. 다만, 거기 카스미가 있다는 기척만 느껴질 뿐이었다. 미안해, 하고 우쓰미는 카스미에게 사과하려고 했다. 하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유카는 자신이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이 자신의 본래의 모습이다. 이제 알았다. 우쓰미는 몇 번이고 끄덕거리며 죽어갔다.” (p.536)


  하지만 소설은 끝까지 유카의 실종과 관련하여 어떤 답도 독자에게 제공하지 않는다. 다만 우쓰미의 꿈을 통해 세 가지 정도의 가설을 제공하는 것에 그치고 만다. (옮긴이의 글에 따르자면 초고에서 작가는 범인을 밝혔지만 편집자의 이의 제기를 받아들여 범인을 특정짓지 않기로 하였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점은 명확한 사건 해결을 포기한 이 희한한 미스터리에서 보기 드문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는 사실이다.



기리노 나쓰오 / 권남희 역 / 부드러운 볼 (柔らかな頰) / 황금가지 / 551쪽 / 2009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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