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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Jul 31. 2024

고이케 마리코 《이형의 것들》

공포와 아름다움, 낯섦과 그리움이 스스럼없이 섞이는...

  방송가에 종사하는 사람들 사이에 이름을 날리던 젊은 여성 점쟁이가 있었다. 어느 해 방송 작가 둘이 이 점쟁이를 찾아갔다. 그런데 이 점쟁이는 두 작가 중 한 명에게만 눈을 맞추었다. 그러니 그 작가만 이것저것 물었고, 점쟁이는 이렇다 저렇다 답변을 하였다. 자기 차례를 기다리던 나머지 작가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왜 제게는 아무것도 묻지 않나요?” 점쟁이는 그 작가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이렇게 물었다. “좋아하는 과일이 있나요?” 작가가 사과, 라고 대답하자 점쟁이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사과를 많이 먹으면 좋겠어요.” 더 이상 상담의 진전은 없었고, 당혹스럽고 의아한 상태에서 두 작가는 돌아 나왔다. 그리고 며칠 후 사과를 좋아한다던 작가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사람들은 그 젊은 여성 점쟁이를 사과 도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오래 전에 들은 이야기이다. 어쩌면 이 이야기에 뼈와 살을 붙이고, 옷을 입히고 치장을 하게 하고 신을 신겨 조용조용 걷게 하면 《이형의 것들》에 실린 단편들이 될 수도 있겠다.

  

  「얼굴」

  “······구니히코는 지금 농로에 꼼짝도 하지 않고 우두커니 서서 앞을 바라보고 있다. 옛 기억의 단편들이 쉴 새 없이 머릿속을 어지러이 오가고 있다. 또렷하게 살아나는 기억도 있고 전혀 의미를 알 수 없이 희뿌옇게 지나가 버리는 기억도 있다. 숨이 몹시 답답하다.” (p.35) ‘숨이 몹시 답답하다’는 문장이 이 작가의 소설에 가장 어울린다. 과거와 현재와 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의 죽음을 양쪽으로 두고 그 사이를 내가, 별일 아니라는 듯 담담한 문장들과 함께 걸어간다. 그래서 오히려 으스스하다.

 

  「숲속의 집」

  휠체어를 써야 하는 쓰치야 씨와 그를 돕는 미사키가 함께 생활하는 별장에 나는 곧잘 찾아가곤 했다. 하지만 어느 날 두 사람이 야유회 중 교통 사고를 당한 다음에는 그 별장을 오랜 시간 찾아가지 않았다. 그 별장이 있는 동네를 십오 년 만에 찾아간 나는 근처의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별장에 올라 오래된 주간지를 읽게 된다.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식스 센스>를 떠올리게 된다.


  「히카게 치과 의원」

  이혼하여 혼자가 된 가스미가 외사촌의 도움을 받아 잠시 머물게 된 도시에서 오래된 치과를 찾아가게 된다. “대기실을 겸한 복도 끝에는 창문이 있었다. 크게 열려 있지만 바깥에 빽빽하게 자란 나무들 때문에 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다. 천장 조명도 꺼져 있다. 그 탓에 복도는 폭풍 부는 날의 해 질 무렵처럼 어둑하다.” (pp.89~90) 충실한 묘사가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데에 일조한다. 오누이의 사랑과 그로 인한 비극적 산물인 아이와 그 아이가 소중히 여기던 인형으로 나아가기 위해서이다.


  「조피의 장갑」

  “······주인을 잃은 집은 소용돌이치는 안개 속에 검푸르게 누워 있는 듯 보였다. 검푸르게 비친 까닭은 지붕에 얹은 거뭇한 서양 기와가 푸른색을 띤 탓도 있지만, 내 눈에 집 자체가 이미 호흡을 멈춰 버린 것처럼 느껴진 탓도 있었다.” (p.123)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었지만 나를 더욱 무섭게 하는 것은 남편이 없는 집에서 발결되는 장갑이다. 나는 그 장갑이 남편을 좋아하여 일본까지 찾아왔다 거절당하고 오스트리아로 돌아간 다음 목숨을 끊은 조피라는 여인의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산장기담」

  은사의 장례를 위하여 찾은 도시에서 나는 택시 기사의 소개로 한 산장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다. 그리고 그 산장 지하에 있는 와인 창고에 존재한다는 귀신 이야기를 듣게 된다. 나는 심령 프로그램을 준비한다는 후배 미스즈에게 이 산장을 소개하는데, 미스즈는 산장에 갔다 왔지만 섭외에는 실패한 상태이다. 하지만 그 후 자신을 찾아온 미스즈를 모니터로 확인한 순간 나는 등에 달라붙은 ‘두 개의 이형’을 발견하게 되는데...

 

  「붉은 창」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것과 이웃하고 지내던 시절. 누구에게도 말 못하고 홀로 두려워하던 나날이었다. 그런데 지금도 그 정체 몰르 상냥함과 조용한 기척을 되살릴 때마다 나도 모르게 황홀해지는 것이다······.” (p.203) 아기를 유산한 언니를 돌보기 위하여 도시로 올라온 나는 이웃집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재력가의 첩이었으며 급사한 옆집의 젊은 여인에 대하여 언니에게 들은 것은 단 한 번 뿐이었지만, 나는 비어 있는 옆집에서 새어나오는 어떤 빛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 밤 나는 비어 있는 옆집에서 나오는 형부를 발견하였고, 저녁놀이 물드는 시간에 빨갛게 물든 이웃집 창에서 한 여자의 얼굴을 본 것만 같다. 그리고 육십살이 넘은 지금까지도 그 이형의 것을 잊을 수 없다. “그렇게 나는 이승과 저승을 잇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음매 같은 것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 이음매에는 언제나 그 여자가 있다. 지금까지 일어난 많은 일들을 떠올려 봐도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고 아무런 설명도 들은 적 없지만 지금도 온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 오싹해지곤 한다. 동시에 한없이 그립고 감미롭기가지 하다.” (p.233) 공포와 아름다움, 낯섦과 그리움이 스스럼없이 섞이는 것이야말로 고이케 마리코의 특징이다.



고이케 마리코 / 이규원 역 / 이형의 것들 (異形のものたち) / 북스피어 / 239쪽 / 2022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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