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운영 《생강》

퇴행하는 역사를 향하여 보내는 조금은 쉬운 방식의 기분 나쁜 토로...

by 우주에부는바람

“누군가 내게 물었다. 왜냐고. 왜 꼭 그를 끌고 다락방으로 들어가야 하느냐고, 2011년 현재에 과거의 유령을 불러오는 이유가 뭐냐고, 그래서 만들어진 이야기가 무슨 의미를 갖느냐고, 그 이야기가 ‘지금’ 나에 의해 소설로 씌어져서 ‘지금’ 누군가에게 읽혀야 하는 이유가 뭐냐고. 그는 습작시절 선생님처럼 집요하게 묻고, 나는 습작생처럼 쩔쩔매며 대답했다. 결국, 써야 하니까, 라고 소리를 꽥 지르고는 도망치듯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책의 말미에 실린 작가의 말에 씌어져 있는 내용이다. 그러고 보니 소설을 읽는 동안 나 또한 계속 그런 의문에 시달린 것 같다. 그러니까 작가 천운영은 ‘왜’, ‘지금’ 이 소설을 써야만 했을까, 하는 물음이 떠나지 않았다. 후일담 소설이라고 부르기에도 애매한, 고문 기술자 이근안을 (아마도 실명으로 알려진 가장 유명한, 독재 정권 하의 고문 기술자라고 할 수 있을) 내세움으로써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너무도 확연하여지기 마련이고, 그래서 오히려 이야기로서의 가치가 떨어질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할만큼 매력적이고 가치있는 소재였을까 싶었던 것이다.


물론 인간으로서 다른 인간을 그렇게까지 몰아갈 수 있을까 싶은 고문기술자라는 명명은 우리 시대 아픔의 또 다른 한 축을 견고하게 만들어주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독재화된 국가 권력에 의해 (소설 속 고문기술자 안이 왕이라고 표현하는) 완전히 신념화된 개인이 (스스로를 개인이라고 생각하는대신 아마도 국가와 동일시하지 않았을까 싶은) 다른 인간을 향하여 (소설 속 고문기술자 안은 이들을 향하여 스스럼없이 개라고 부르짖는다) 뿜어내는 절대악은 눈 뜨고 바라보기 힘든 거부감을 자아낸다. 그런 면에서 굳이 이러한 악행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그러한 아비를 둔 딸을 등장시킨 것 또한 필요불가결한 것이었다고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내 몸에 축제가 벌어진 것 같아. 생크림처럼 몽롱하고, 불고데처럼 뜨겁고, 홍옥처럼 쌔끈한 내 몸의 축제. 내 몸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시작된 떨림은 배꼽을 지나 명치뼈를 짓누르고 목구멍까지 단번에 치올라온다. 아…… 이런 느낌.”


그러니까 고문기술자 안이 자신이 저지른 죄를 죄라 여기지 못하고 있는 동안 이제 막 피어오르는 대학 새내기인 안의 딸 서원은 그렇게 떨리는 마음으로 한 사내를 항하여 순수하고 또 순수한 축제를 경함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그 딸이 마음을 두고 있는 사내가 민주화라는 시대의 요청에 잔뜩 귀 기울이는 뜨거운 젊은 양심을 가지고 있는 자라는 설정 또한 조금은 작위적이라는 느낌이다.


그러니 그의 딸이 자신의 집을 염탐하는 한 사내가 건네준 신문 쪼가리로 자신의 아비의 정체를 알게 되고, 그것으로 자신의 아비를 향한 그때까지의 모든 감정을 한순간에 뒤집고, 또한 자신의 첫 순정의 상대인 남학생에게 자신의 아비에 대해 고백하고, 그것으로 그 남학생과의 관계를 파탄지경으로 몰아가고, 그렇게 다시금 자신의 아비를 향한 적의의 송곳니를 한껏 세우는 과정도 부드럽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저것은 내 아빠가 아니다. 저것은 짐승이다. 침을 질질 흘리며 송곳니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성난 짐승이다. 아니다. 저것은 짐승이 잡아다놓은 썩은 고기다. 눈알이 빠지고 내장이 파헤쳐진 먹다 남긴 고깃덩어리. 아니다. 저것은 썩은 고기에 달려드는 파리떼다. 윙윙윙윙 더러운 날개짓 소리가 들린다. 아니다. 저것은 파리가 까놓은 구더기다. 살을 뚫고 꾸물꾸물 기어나오는 징그러운 구더기다. 썩은내가 난다.”


그렇게 아버지는 세상 속과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숨어 지내던 10년 11개월을 뒤로 한 채 자수를 결심하고, 열아홉살이던 나는 서른살이 된다. 여기에 에필로그처럼 붙어 있는 내용을 보자면 엄마는 이런 아버지를 면회하러 다니며 먹고살 궁리를 다해놨다는 아빠에 의해 표정이 밝아지고, 아버지를 감옥에 가둔 정신 나간 세상을 바로잡기 위하여 무슨 일이든 하겠다며 당당하다.


사실 내게 있어 소설의 다른 모든 부분을 합친 것보다 더욱 공포스러웠던 것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인간이라고 이름 붙이기 힘든 비인간적인 행위를 하였던 한 인간이 아무런 반성 없이도 태연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이 사회, 그래서 더욱 비정하게 느껴지는 이 사회가 무섭게 느껴졌다. (소설을 읽는 동안 고문기술자 이근안에 대한 검색을 하였는데, 그가 이미 출소하여서 목사로 활동하고 있다는 기사를 읽을 수 있었다. 도대체 우리 나라에서 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다시 한 번 끔찍한 사유를 해야 했고...)


작가가 가지는 깊은 사유의 방식을 드러내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소재였다고 조심스럽게 유추해본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러한 소재를 다루는 방식이 너무 쉬웠던 것이 아닌가 소심하게 따져보고 싶다. 너무 극명하게 드러나는 선과 악이라는 (아버지와 딸, 혹은 고문기술자와 고문피해자) 이분법의 방식이 아니라 한 꺼풀 더 벗기고 들어가 악한 것, 그리고 그보다 더한 악에 대하여, 혹은 이러한 악함을 향하여 양분을 공급하고 있는 이 사회를 바라보는 데에 작가 특유의 고급한 문장(혹은 사유)을 더욱 치중하여줬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하여도 이 혼탁한 시대에 작가로서 이러한 소재를 다루는 작은 용기를 내줬다는 것에는 혼신의 박수를 보낸다.



천운영 / 생강 / 창비 / 282쪽 / 2011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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