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문제는 언제 어디서나 중요한가...
*1998년 1월 14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로시니라는 레스토랑에서 벌어지는 사소하지만 의미심장하고, 의미심장하지만 어디에든 존재하고, 어디든 존재하지만 극히 드물게 표면화되고, 드물게 표면화되지만 쉽게 잊혀지지 않고, 잊혀지지 않는 대신 끝을 보아야 하는 사랑, 같은 영화일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그 무엇인가의 시나리오다.
시나리오를 모두 읽은 다음에 그 앞에 실린 영화 스틸 사진들을 들여다보는데 실제 어디서 보았던 사진들처럼 낯이 익다. 신기한 경험이다. 무수한 등장인물들과 그들을 교묘하게 얽어매는 기술도 기술이거니와 작가 자신 스스로를 향한 은밀한 조소, 사랑에 대한 위트와 함께 경멸의 의식, 성에 대한 거친 통찰 등이 골고루 배합되어 있다.
주요 등장인물인 우 치고이너와 오스카 라이터가 갈망해마지 않는 발레리라는 여자는 끝까지 어느 한 쪽으로 기울지 않은 채 죽음을 맞음으로써 제 사랑에 무릎 꿇지 않고, 칠리와 동성애자 관계에 있으면서도 백설공주는 제 야망을 채우려 로시니, 치고이너, 라이터를 차례대로 함락시킨다. 결코 여기에 해답이 있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으면서도 사랑에 대해, 성에 대해, 남자와 여자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를 던지는 영화였을 것이라 예상된다.
조금 다르게 평하는 법을 배우기로 작정하며 다시 써보자면...
로시니 혹은 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잔인한 문제.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닌 것 같다. 누가 누구와 더 만족했는가 하는 게 더 잔인한 문제이다. 사내1과 사내2가 있다. 그들은 모두 여인2과 섹스를 했다. 혹은 여인1과 여인2가 있고 이들은 모두 사내3과 섹스를 했다. 그 순간 중요해지는 것은 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것이지만 다은 순간 더욱 부각되는 것은 여인1은 또는 사내3은 누구와 자는 것에 더 만족해 했는가 이기 쉽상이다. 물론 여기에는 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것과 사랑은 별개의 것이다 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아니아니 더욱 새로운 방법으로 써보자면...
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것이 부각되는 세상인가? 비구니가 젖소 부인을 빌려다보고 젖소 부인이 사슴피를 흘린다한들 누구 하나 신경을 쓸 세상인가 말이다. 아니 설령 벽장 속 오래된 괘종시계에게만큼 신경을 쓴다고 치자. 그래서 달라지는 게 무엇이 있겠는가. 사람들은 사람들에게서 시선을 떼어버린지 오래이다. 마지막 화염병에 대한 기억만큼이나 오래 전 일인 듯하다. 우리들은 이제 자신의 무식을 감추기 위해 뇌수를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다니며, 고개 숙인 제 성기에 코를 박고는 깨어날 줄을 모르는 데 말이다.
파트리크 쥐스킨트, 헬무트 디틀 / 강명순 역 / 로시니 혹은 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잔인한 문제 (Rossini oder die moerderische Frage, wer mit wem schlief) / 열린책들 / 1997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