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주에부는바람 Jul 27. 2024

손홍규 《귀신의 시대》

다사다난하였던 근현대사를 다종다양의 인물들로 통과하는...

  작가는 75년생이고 정읍 출신이다. 정읍이라고 하면 내 어머니의 고향인 김제시보다 아래, 내 아버지의 고향인 부안군보다 더 아래에 있는 고장이다. 어린 시절 방학 때마다 아버지의 고향인 부안에 계신 할머니를 찾아갔다. 그리고 정읍이나 이리(지금의 익산)와 같은 지명이 지금도 낯설지 않다. 이리는 내려가는 길에 거처야 했으니 그렇다 치지만 정읍이 낯설지 않은 이유는 잘 모르겠다. 

  “따식이의 어미 하나코는 이곳 전라도 정읍의 본정통에서 최초로 사람들에게 목격되었다. 하나코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떠돌이 장꾼 사내 최덕수(그는 오랫동안 정읍에서 화려한 생활을 구가하던 최씨 가문의 일원이었으나 오입과 도박으로 방탕한 세월을 보내다가 결국 가문에서 쫓겨났다. 그가 쫓겨난 건 필연적인 일이랄 수도 있는데, 그는 첩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그가 비록 장돌뱅이로 전락하였여도 젊은 시절의 명성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일화가 있다. 그는 자신의 옹기를 사러 나온 내지인 정읍 주재소장의 마누라를 자빠뜨렸는데, 그로부터 열 달 뒤 주재소장은 평생 소원이었던 아들을 얻었고 다나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다나카는 훗날 자신의 조국이 태영퍙 전쟁에서 패하자 아버지의 고향으로 돌아가 동경대학에 들어갔고 자신의 조국에서 물리학자로 이름을 날렸으나 실상은 자신이 조선인 최덕수의 피를 물려받았다는 건 까맣게 몰랐다. 모르는 게 나을 것이다, 세상의 다른 많은 일들처럼)였는데...” (p.15)

  얼마전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 손홍규의 산문들을 좋아한다고 했더니 집에 그의 소설이 있다며 바로 다음날로 빌려 주었다. 굉장히 많은 등장 인물이 소설에 나온다고 하였는데,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읽어서 그런지 굉장히 많다, 라는 느낌은 없었다. 게다가 작가는 위의 문장에서처럼, 괄호의 내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등장하는 인물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려고 무진 애를 쓴다.

  “나는 삶과 죽음을 무를 반 토막 내듯 나눌 수 없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죽었다 해도 살아 있는 것, 살아 있다 해도 죽어 있는 것. 의미의 혼재와 존재의 불확실성이 삶의 특징이며 마찬가지로 죽음의 특징이란 걸 깨닫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그저 삶이 지니고 있는 수많은 비밀 가운데 하나를 엿보았다고나 할까...” (p.76)

  제목에서 아예 스포일러를 제공하고 있듯이 《귀신의 시대》는 귀신의 이야기이다. 《귀신의 시대》는 일종의 액자 소설이기도 한데, 금지가 풀린 저수지에 낚시를 하러 간 내가 만난 귀신이, 내게 풀어 놓는 이야기가 곧 소설의 내용이기도 하다. 그 소년이 살았던 일정한 시기에 소년이 살았던 마을에서 대대로 살았던 인물들 그리고 마을을 들고 나는 여러 인물들을 통해 당시의 사회를 돌아보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리 마을 넓죽이네 식구는 가만히 있어도 주위의 시선이 쏠렸다. 워낙 대식구인 데다 딸만 내리 아홉이니 관심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후남이가 개구리를 산 채로 입에 넣어 우물거렸다거나 막둥이가 고추밭에 들어갔다거나, 넓죽이가 뱀 꼬리를 붙잡고 휘둘렀다는 둥 예사롭지 않은 자매들이 끊임없이 일으키는 사고는 무료한 삶에 신선한 군입거리가 되었다.” (p.225)

  따식이와 나, 댓골댁과 소장수 용칠이 아저씨 등이 마을에 자리를 잡고 있는 인물이라면 푼수 선생이나 삼촌은 마을을 들고 나는 인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소설에는 묘하게 케미를 발산시키는 관계들이 있는가 하면 적대적인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는 관계들도 있다. 나와 따식이, 삼촌과 종구형, 최선생과 승우의 누나가 전자에 해당한다면 당골내 막내와 삼촌, 행기 아저씨와 배순경은 후자에 속한다. 

  “나는 삶과 죽음을 구분하지 못했다. 나는 귀신이 되어서도 산 사람처럼 살았다. 그러나 나는 장담할 수가 없다. 어쩌면 나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한참을 거슬러 태어나자마자 죽었는지도 모르고, 아니 어쩌면 나는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또한 나는 중학교를 졸업할 것이고 아마 고등학교에 들어갈 것이다. 그래서 동방삭처럼 오래오래 살지도 모른다.” (pp.360~361)

  소설에서는 정읍이라는 고장과 노령산맥이 중요한 지리적 상징으로 등장하는데, 소설의 앞자리에서 동학농민혁명이 은근슬쩍 다뤄지는 것과 일맥상통 한다. 이후에도 소설은 일제 시대, 그리고 이승만과 박정희의 시절을 거쳐 직선제 개헌에 이르는 역사를 지긋하게 훑는다. 어쩌면 제목인 ‘귀신의 시대’는 이 믿기지 않을만큼 다사다난 하였던 우리의 근현대사 전체를 의미한다고 보아도 무방하겠다.

손홍규 / 귀신의 시대 / 랜덤하우스중앙 / 387쪽 / 2006

매거진의 이전글 정지돈 《야간 경비원의 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