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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Jul 29. 2024

김미월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

적당하고 수월하게 펼쳐보는 것이 가능한...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

  강남의 동서를 가로지르는 길에 붙어 있는 테헤란로, 라는 이름. 그 의아한 작명의 원유야 이제 많은 사람이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게는 여태 의아할 수도 있는 이름. 그 테헤란로를 마음껏 가로지르지 못하며, 자신이 지금 맞닿아 있는 생을 향하여, 오히려 한 발 떨어진 듯 의아한 양태로 대응하는 것 같은 주인공 진수.


  「29200분의 1」

  인간의 한 평생 80년에 365일을 곱하면 다가서게 되는 숫자 29200, 그러니까 오늘 하루는 그 29200분의 1이 된다. 일흔 살 그러니까 이미 25000일을 넘어 산 할아버지는 상가에서 무거운 지게를 나르고, 그러나 할아버지에게 제일 무거운 지게는 아무것도 안 실은 지게, 나는 모의고사가 치러지는 학교에 들어가지 않는다.


  「현기증」

  ‘달리 할 말도 없었다.’라는 문장에서 ‘달리’라는 이름을 가져온 달리는 얼마전 회사에서 잘렸다. “장마가 물러나고 폭염이 지나가자 가을이 왔다. 마을은 활기로 가득했다. 학교는 시끌벅적했고 결혼식장은 주말마다 장사진을 이루었다. 마을이 곧 시로 승격되리라는 소문이 구체화되었다. 교회는 증축을 했고 절은 신도 수가 늘었다. 노인들은 건강했고 어린아이들은 뛰어다니다가 곧잘 넘어졌지만 금방 일어났다...” (p.78) 그렇게 오래전 달리와 마을의 사람들은 달리의 선생님이 사라진 사실을 잊었고, 나는 지금 점집을 찾아가 점괘와 마주한다. 


  「중국어 수업」

  인천의 어학원에서 중국인이 대다수인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수는 매일 전철을 타고 서울에서 인천으로 향한다. 그렇게 일터를 향하는 전철 안에서 그녀는 같은 시간 비슷한 인물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마주치는 인물들의 신산함은 수가 가르치는 젊은 이방인들의 신산함과 다른 듯 비슷하기도 하다.

 

  「모자 속의 비둘기」

  “올해는 정초부터 유난히 부고가 많았다. 푸른 이십대가 이미 지나가버렸음을 상기시켜주듯 삶은 수시로 내게 검은 옷을 입을 것을 요구했다. 죽음은 겪고 또 겪어도 늘 갑작스러웠다. 마술사의 모자 속에서 하얀 비둘기가 푸드덕 날아오를 때처럼 산 자들은 속수무책으로 그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떤 마술사도 모자에서 비둘기를 꺼내기만 했지 그 비둘기를 다시 모자 속으로 집어넣지는 않았다. 나는 매번 빌린 정장을 입고 빌린 구두를 신은 채 내 눈앞의 흰 비둘기를 멍하니 바라보고는 했다.” (p.118) 그러니까 죽음은 아직 꺼내지지 않은 비둘기 같은 것이고, 한 번 꺼내진 비둘기는 다시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안부를 묻다」

  ‘십년 후에 만나자. 정확히 십년 후 오늘 이 자리에서.’와 같은 허망한 약속의 기억이 많은 이들에게 있을 것이다. 소설 속의 나 또한 마찬가지이고, 그 약속들은 한 번도 지켜지지 않은 채 유효기간을 지나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 중 하나는 다른 사람과의 약속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과의 약속이었다.


  「정전(停電)의 시간」

  불꺼진 시간에 펼쳐지는 일종의 이미지즘 소설이랄까. “꽃향기가 더욱 짙어졌다. 병태는 고개를 돌렸다. 꿈일까. 나무에 매달려 있던 동백꽃 한 송이가 제 그림자를 조준하며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다.” (p.187) 이 캄캄한 그래서 더욱 훤히 보여지는 묘사의 향연은 이 문장으로 마무리된다.


  「수취인불명」

  크리스마스를 앞둔 뉴욕의 99쎈트 스토어에서 일하는 내가 서울에 보낸 엽서는 수취인불명으로 돌아왔다. 함께 일하는 정은 권을 좋아하고, 나는 포춘 쿠키를 사러 오는 쿠키맨이 나를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정으로부터 듣는다. 뉴욕에 도착하여 신세를 지고 있는 자칭 이모는 스토어의 사장과 함께 살기로 하고, 나는 정과 권과 함께 타임스퀘어서 마지막 날을 보낸다. 그리고 해가 바뀌는 그 순간 나는...


  「프라자 호텔」

  시청 앞 프라자 호텔에서 아내와 함께 휴가를 보내기로 한 나는 과거의 한때를 소환한다. 예비소집일에 양복을 입을 정도의 촌놈이었던 내가 재수를 한 동급생인 윤서를 흠모하였던 그때는 김건모와 룰라와 R.ef의 노래가 유행이었고, 노찾사의 노래가 학교 방송국에서 선곡되었으며, 전두환 인형이 길거리에서 불태워지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프라자 호텔에서의 지금은 전직 대통령의 죽음을 분향하고, 현수막 문구가 용산 참사의 해결을 요구하는 중이다. 그리고 그때의 우리와 지금의 우리가 겹쳐진다.



김미월 /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 / 창비 / 259쪽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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