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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수알도 부팔리노 《그림자 박물관》

회귀할 수 없어 회귀하게 되는 기억 저편을 향한 기억의 도전...

by 우주에부는바람

2008년에 읽은 작가의 소설 <그날 밤의 거짓말>의 뛰어난 스토리텔링이 다시금 떠오른다. 이번 산문집의 날개에 실린 이야기를 읽자니 그의 소설이 가지는 힘은 그의 고국에서도 대단하였나보다. 이야기인즉슨 그의 작품이 이탈리아의 문학상인 ‘스트레가 상’ 후보작으로 올려졌을 때 같은 상에 후보로 올라간 다른 작가들이 전원 사퇴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말했단다. “이렇게 훌륭한 작품과 경쟁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그러니 아직 그의 소설 <그날 밤의 거짓말>을 읽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읽어볼 일이다.


“... 이 얘기들을 하고자 한 내 원래의 순수한 의도는 위기에 처한 귀중한 장소와 시간을 명예롭게 하고 싶어서다...”


산문집은 작가의 고향이기도 한 시칠리아 섬, 코미소라는 지방에 대한 그의 귀중한 기억들을 담고 있다. 물론 그곳을 자신의 근원으로 삼지 않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낯설 뿐이지만, 그의 애정이 듬뿍 담겨 있는 글들은 우리들의 고향 혹은 우리들이 보고 듣고 느꼈던 어린 시절의 어떤 곳 혹은 어떤 시간으로 우리들을 시간 이동 그리고 공간 이동시키는 역할을 한다.


“부랑자 노인 누오프리우는 몸뚱이 하나 누일 자리가 없었다.. 아침 일찍 그를 깨운 사람들한테 그는 동전 한두 푼을 받고 자신의 몸에 박힌 커다란 티눈이 어떤지 이야기해주었다. 그의 티눈은 폭풍우가 올지 안 올지를 노스트라다무스처럼 기막히게 알아맞혔다...”


산문집은 ‘사라진 직업들’, ‘추억의 장소들’, ‘방언’, ‘속담과 농담’, ‘소소한 1930년대의 기억들’, ‘추억의 얼굴들’ 과 같은 챕터를 통해서 그가 시칠리아 섬에서 보고 들었던 사람과 장소와 말과 기억들을 되새기고 있다. 그리고 그의 글을 읽는 동안 나 또한 이제는 잊혀진 기억 속의 그곳으로 은근한 여행을 떠나는 즐거움을 만들어갈 수 있게 된다.


“... 우리는 얼마나 많은 그림자를 끊임없이 잃어버리고 있는가. 그 잃어버린 그림자의 우물에서 우리는 어부가 물고기를 잡아 올리고 거지가 동냥을 거굴하듯 지칠 줄 모르는 노력으로 검은 재를 길어 올린다. 그러는 사이 늙는다. 그것이 법칙이다...”


그렇게 나는 작가의 글들을 따라 구멍 난 냄비를 때우는 일을 하던 땜쟁이 사내들의 목청을 길어 올리고, 눈이 오면 넓디 넓은 잔디를 이용해 눈썰매를 탈 수 있었던 초대 부통령이던 장면 박사의 묘지를 길어 올리고, 전라도와 충청도와 경기도의 사투리가 섞여 있었던 어린 시절의 내 말투를 길어 올린다.


“... 결국 모두에게 존재보다는 부재, 너무나 아픈 기억보다는 캄캄한 기억상실이 더 좋은 것일까? 그런 쓸 데 없는 의심을 하며 나는 대답을 짜내지 않을 수 없었다. 달콤하면서도 고통스런 대답을 말이다. 카드 게임 선수가 자신의 테이블로 돌아오듯, 나는 과거의 나를 되돌아보는 나쁜 습관(축복이자 저주이다)으로 돌아왔다.”


생각해보면 늙는 것을 도와주는 사람은 없다. 늙음의 과정은 온전히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기도 하다. 그것을 누군가에게 불평할 필요도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지나온 것들을 캄캄한 기억상실의 방으로 보내고 문을 잠그는 것도, 살그머니 그 문을 열어보는 습관을 갖게 되는 것도 모두 자신의 몫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로 오늘, 지금은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은 (나에게 구매를 충동질했던 이가 옷을 입은 나를 향하여 중년의 빅뱅 스타일이라고 명명하기도 한) 청바지를 하나 샀다. 언젠가는 바로 오늘, 나의 어정쩡한 청바지 구매의 기억 또한 컴컴한 방의 어느 구석에 놓여진 채 내가 끄집어내주기를 바랄 수도 있겠지...



제수알도 부팔리노 / 이승수 역 / 그림자 박물관 (Museo D'Ombre) / 이레 / 219쪽 / 2009 (2007, 1993,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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