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에 의해, 싫어도 마주쳐야 하는 우리들 의식의 저 밑바닥...
이런저런 소재를 가지고 정교한 장편 소설을 써서 탄성을 자아내게 만드는 이언 매큐언의 첫 번째 단편 소설집이다. 작가가 보여주는 상상력의 시작 즈음에 어떤 작품들이 있었는지를 확인하는 일은 흥미진진하다. 70년대 중반에 씌여졌다는 그의 글들은 얼핏 잔혹 취미와 이상 성욕으로 범벅이 되어 있지만 그가 뿜어내었음직한 오만하고 역겨운 젊음은 꽤나 거침없다.
「입체기하학」.
사는 동안 끊임없이 자신의 일상을 기록으로 남긴 증조부의 일기를 읽는 낙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 그리고 이러한 나를 끊임없이 들볶는 아내... 그러던 중 나는 증조부의 일기에서 입체기하학에 대한 글을 읽게 되고, 드디어 그러한 입체기하학의 신비를 밝힐만한 증조부의 발견을 알게 되는데... “... 수학과 관련된 낙서로 가득한 어느 페이지의 맨 아래쪽에 이런 메모가 있었다. ‘차원은 의식의 함수이다.’ 다음 날 기록을 넘기다가 나는 이런 글을 읽었다. ‘내 손 안에서 사라졌다.’ 그는 표면이 없는 평면을 재현해 낸 것이다...” 증조부가 남긴 신비주의로서의 입체기하학, 그리고 나와 아내 사이의 현실적인 벽을 해체하는 능력을 뽐내는 입체기하학의 이야기...
「가정 처방」.
열 네 살의 나는 레이몬드라는 친구에게 이끌려 성인의 세계에 한 발 한 발 접어드는 중이다. 하지만 룰루 스미스를 통한 어른들 세계로의 접근이 실패로 끝난 후 집으로 돌아와 어린 동생 코니와의 섹스를 시도하는데... “... 아마도 그건 인류의 교접 역사상 가장 초라한 성교 행위의 하나였을 것이다. 거짓말, 사기, 모욕, 근친상간, 성교 도중 상대가 잠드는 것, 모기처럼 희미한 오르가슴까지 모든 것이 들어 있으니까. 게다가 침실을 가득 메우는 흐느낌까지...”
「여름의 마지막 날」.
여러 사람이 함께 사는 집에 어느 날 제니가 들어온다. 그리고 제니는 사람들과 조금씩 거리를 좁혀 가고 다른 룸메이트의 딸인 앨리스를 돌보는 일에 흠뻑 빠진다. 하지만 이 뚱뚱한 제니와 어린 앨리스, 그리고 나로 이루어진 이 세 명의 동행자는 그 해 여름이 끝나가던 날 강으로 보트를 타고 나갔다가 결국 사고를 일으키고 마는데...
「극장의 코커 씨」.
섹스를 흉내내는 동작으로 가득한 뮤지컬을 연습하는 무대 위... 하지만 어느 새 무대 위의 두 배우는 가짜가 아닌 진짜 섹스에 몰입하고, 연습을 지휘하는 연출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둘 만의 행위는 결국 그 끝에 이르러서야 끝이 나게 되는데...
「나비」.
“바보같이... 나비가 어디 있다고.” 아동 성애자의 일거수 일투족을 너무도 스스럼없이 훑고 지나간다. 마치 아름다운 연인의 밀회 장면이라도 된다는 듯 담담하게 이들의 산책의 여정을 살피는 작가의 머릿속이 살짝 두려웠다고나 할까.
「벽장 속 남자와의 대화」.
“... 아마도 한평생을 그렇게 보낼 수도 있었을 겁니다. 내 삶의 첫 두 해를 언제까지나 반복해서 살아가며 불행하다는 생각 없이. 사실 엄마는 정말 좋은 여자였어요. 나사가 좀 풀렸다는 것 말고는. 그게 다예요.” 이런 엄마에 의해 십대 후반까지 어린 아이로 살았던 나는 갑자기 엄마가 남자에게 빠지면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그 새로운 인생의 마지막 여정에는 벽장이 있다.
「첫사랑, 마지막 의식」.
첫사랑에 빠진 시셀과 나...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에 방해자로 나타난 시셀의 동생인 에이드리언... 그리고 이제 시셀은 공장에 일을 하러 나가기 시작하고, 어느 날 두 사람의 방에 나타난 커다란 쥐는 지금까지 그들의 사랑의 난코스를 집대성한 듯 보인다. 하지만 결국 시셀의 생리혈을 닮은 빨간피를 뿜는 죽은 쥐를 바다에 내던지고 돌아와 다시금 매트리스에 자리를 잡은 나와 세실은 예전의 평화로움을 되찾는다.
「가장 무도회」.
어머니의 죽음 이후 이모에게 맡겨진 헨리... 하지만 무대에 오르는 것을 업으로 삼았던 그녀는 어느 날부터 자신이 원하는 옷을 헨리에게 입히고 역할극에 흠뻑 빠지게 되었다. “...종잡을 수 없었지만 어쨌든 이번 일로 가장 의식에 대한 재미는 사라졌다. 미나의 가장 의식에서 일종의 강압을 눈치 챘고, 저항할 엄두도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헨리에게 기대 오는 방식이나 숨을 몰아쉬는 모습엔 어두운 무엇, 그가 이해할 수 없는 무엇이 있었다...” 특히 같은 반에서 사귀게 된 친구 린다와 함께 하는 시간에서 충족감을 느끼고, 린다의 집에서 정상적인 가정을 깨달은 후에는 더더욱 집안에서의 가장극이 힘겨워지게 된 헨리...
이언 매큐언 / 박경희 역 / 첫사랑, 마지막 의식 (First Love, Last Rites) / media 2.0 / 211쪽 / 2008 (19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