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가능한 이성을 제대로 가로막는 예측불가능한 광기의 사랑...
어느 한가한 오후 나는 일을 하고 오랜만에 돌아온 아내가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피크닉을 떠난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달리기 시작한다. 열기구가 추락하는 장면을 목격한 것이다. 동시에 근처에 있던 네 명의 사람들이 함께 달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열기구가 불시착한 곳에서 열기구에 타고 있던 아이를 구하기 위해 애를 쓴다. 하지만 다음 순간 강한 바람이 불어오고 열기구는 다시금 날아오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열기구의 줄을 잡고 있던 다섯 명 중 누군가가 먼저 줄을 놓고 만다. 나머지 세 사람이 모두 줄을 놓아버리는 동안 존 로건이라는 인물만은 끝까지 줄을 부여잡고 있다. 그리고 열기구와 함께 하늘로 날아오르고, 어느 순간 그는 줄을 놓치고 땅으로 추락하여 죽고 만다.
“로프를 놓지 않고 아이를 구하고 싶은 욕망과 거의 동시에, 신경 단위의 고동이 한 박자도 채 울리기 전에, 두려움과 복잡한 수학적 계산이 한데 섞인 다른 생각이 몰려왔다... 일초 일각이 지날 때마다 지면은 더 멀어졌고, 손을 놓기가 불가능해지거나 목숨이 위험해지는 지점이 닥쳐오고 있었다...”
‘영국 현대문학의 최고 지성’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이언 매큐언의 이번 소설은 이처럼 참담한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과학 저널리스트인 나는 갈등한다. 맨 처음 줄을 놓은 사람은 나였을까? 만약 나머지 사람들이 줄을 놓지 않았다면 열기구는 떠오르지 않았고 존 로건도 살아 남을 수 있었을까? 이도저도 아니라면 어차피 나중에 열기구가 무사히 지상으로 내려온 것을 보면 그의 죽음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었을까?
하지만 이런 갈등 속에서도 나는 차츰 안정을 찾아가는 것 같다. 큰 도움을 주는 것은 아내인 클라리스이다. 그녀는 나의 가슴 속에 둥지를 틀려는 어두운 트라우마를 없애주기 위하여 노력을 기울인다. 그런 사고가 있은 다음에도 그녀는 나를 보듬어 안는다. 상심에 잠긴 내가 사랑에마저 두려움을 느끼는 동안에도, 그녀는 자신의 숨결을 나에게 불어넣고, 나로 하여금 살아있음의 감촉을 제공한다.
“... 사랑을 나누기에 앞서 보내는 소중한 시간을 ‘전희’라는 임상 용어 비슷한 이름으로 부르는 건 옳지 않다. 그 시간에는 세상이 좁아지고 깊어진다. 우리 목소리는 육체의 온기 속으로 가라앉으며 관념적이고 예측불가능한 대화를 나눈다. 모든 것이 감촉이 되고 호흡이 된다...”
하지만 이와는 별도로 난데없는 문제가 생긴다. 열기구를 붙잡았던 또 한 명의 남자인 패리가 나에게 사랑 고백을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전화로 자신의 사랑의 사실을 알린 남자는 이제는 내 앞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날 존 로건의 죽음 앞에서 내게 종교적 제의를 함께 하기를 원했던 그는, 이제는 자신들의 사랑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서있고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다.
“... 병적인 사랑이 있다면 거기엔 건강한 사랑에 대한 개념도 암암리에 있어야만 한다. 드 클레랑보 신드롬은 어둡고 뒤틀린 거울로, 사랑에 대한 무모한 탐닉이 하등 문제가 안 되는 연인들의 눈부신 세계를 비추고 패러디한다...”
프랑스의 한 여인의 국왕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되었다고 여겨지는 드 클레랑보 신드롬으로밖에 설명되지 않는 이러한 페리의 서툴지만 집요한 사랑 고백은 점점 그 수위를 높여간다. 그 와중에 나는 존 로건의 미망인을 찾아 사건의 또다른 전모를 밝혀내기도 해야 하고, 아내 클라리스와의 점점 나락으로 치닫는 듯한 관계에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나는 점점 우연한 사고로부터 기인한 상황의 변화들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된다.
“... 우리 감각의 데이터는 욕망과 믿음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하며 굴절되고, 그에 따라 우리의 기억 또한 왜곡된다. 우리는 자신에게 유리하게 보고 기억하며 거기에 맞추어 스스로를 설득한다. 무자비한 객관성, 특히 우리 자신에 관한 무자비한 객관성이라는 사회적 전략은 언제나 실패하는 운명이었다...”
과학 저널리스트라는 설정의 나와 드 클레랑보 신드롬에 사로잡힌 남자라는 설정의 패리를 통하여 작가는 우리들이 (광기의 반대편으로서) 이성이라고 믿는 것의 허상을 적나라하게 말하는 듯하다. 우리들이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고 여기는 우리들에 대하여, 작가는 아직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추궁하는 듯하다. 대중적인 읽는 재미를 배격하지 않으면서도 생각할거리를 주는 작가의 글쓰는 방식이 좋다.
이언 매큐언 / 황정아 역 / 이런 사랑 (Endruing Love) / 미디어2.0(media2.0) / 342쪽 / 2008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