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딱 한 군데 남은 우리 고양이의 흔적으로도 따뜻한...
* 이 글은 나와 아내의 고양이 용이가 무지개 다리를 건너고 삼 년이 지난 다음에 작성되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삼 년 전의 일이다.
아침에 현관문을 열고 출근을 하다가 문득, 저녁에 비밀번호를 누르다가 또 문득,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곤 한다. 현관문과 문틀의 한 지점에는 아직 거뭇한 흔적이 남아 있는데, 삼 년 전 오늘 우리 곁을 떠난 고양이 용이가 남겨 놓은 것이다. 용이는 저녁이면 현관에서 시선을 내게 돌려 문을 열어달라고 채근하고는 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면서 한 번, 다시 들어오면서 한 번, 용이는 자신의 몸을 그곳에 문지르곤 하였다.
“아주 짧은 시간을 일컫는 말 같지만, 사실 문득 속에는 오랜 시간의 지층이 쌓여 있습니다. 마음속에 오래 담아 숙성시키지 않고서는, 문득을 발동시킬 수 있는 힘이 만들어지지 않을 테니까요.” (p.113)
고양이 용이는 열쇠고리에 달고 다니는 팬던트에도 있다. 재로 남은 용이의 일부를 담아서 아직 몸에 지니고 다닌다. 때때로 손에 꽉 쥐고 있으면 언젠가 용이가 선심을 쓰듯 내어준 용이의 보드라운 발바닥을 만지고 있는 것처럼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 사무실 열쇠가 팬던트와 함께 매달려 있어 매일 바지춤에서 꺼내고 집어 넣는다. 처음처럼 문을 열려다 말고 멈춰서서 쳐다보지는 않는다. 삼 년이 지났다.
”갸르릉~ 갸르릉~ 숨소리가 모닥불만큼이나 따뜻하다. 투득, 장작이 불티를 날리며 주저앉을 때마다 졸린 눈을 떴다가 감는 고양이. 가까이 다가와 있던 상념이 녀석의 눈빛에 아득히 멀어진다. 불이 나무를 먹어 치우는 만큼 밤은 더 깊어진다... 모닥불이 꺼지고 별의 불씨가 조금 더 늘었다. 물어는 별이라도 하나 따려고 그러는지, 지붕을 이리저리 뛰기 시작한다.“ (p.89)
용이와 만난 때로부터는 이십 년이 흘렀다. 어린 고양이가 아니어서 당황하였다. 임보였지만 결국은 우리의 용이가 되었다. 처음 우리에게 오던 날에는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고, 용이는 플라스틱 캐리어 내부에서 작은 눈을 반짝였다. 용이의 캐리어는 아직 우리에게 있다. 고양이 들녘이가 그리고 고양이 들풀이가 그 캐리어를 이용해 우리에게 왔고 그 캐리어에 실려 병원에 다녔다.
“어느 날 밤 고양이 물어가 왔다. 냐아옹~, 그리고 한참 뒤에 또 두 마리의 고양이 운문이와 산문이가 찾아왔다. 냐아옹~ 냐아옹~, 그러고 보니 물어도, 운문이와 산문이도 식목일을 전후해서 태어난 봄 고양이. 나는 몇 해의 겨울을 녀석들의 체온에 기대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우울해할 때마다 고양이들은 무릎으로 올라와 나의 가슴에 머리를 문질렀다. 그러면서 그 맑은 눈동자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는 했다. 녀석들의 눈 속에 그 옛날 마당에 가득했던 보석들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는 걸 뒤늦게야 깨달았다.” (pp.105~106)
용이라는 고양이와 함께 살게 된 이후 세상의 모든 고양이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길상호의 에세이 《겨울 가고 나면 따뜻한 고양이》에도 그런 내용이 실려 있다.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는 이들에게 공통되게 나타나는 감정의 궤적인 셈이다. 저자는 물어, 운문이, 산문이 그리고 꽁트라는 네 마리의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다. 책에는 펜화(?)라고 부를만한 흑백의 고양이 그림들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 세상의 것들이 다 시들어버린 겨울에 태어났다. 나는 그날의 풍경을 조금 오려 와서 어두운 심장 한쪽 벽면에 걸어 놓았다. 찬바람이 스치는 날이면 반짝반짝 빛나는 그림, 나는 그것을 보면서 어두운 겨울의 심장을 견뎌낼 수 있었다.” (pp.100~101)
겨울이고 고양이와 얽힌 아내와의 대화 한 토막이 떠오른다. 어느 겨울 집으로 오는 길에 아직 고양이 용이와 꼭 닮은 어린 고양이를 보았고, 이 사실을 아내에게 전했다. 그 말을 들은 아내는 어떻게 해 추울 텐데, 라며 혀를 끌끌 찼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이렇게 대꾸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그 고양이는 엄마 고양이랑 함께 있더라고. 아내는 곧 나를 흘겨보며 이렇게 나무랐다. “형은 엄마랑 있으면 추울 게 안 추워져?” 아, 물론 그건 아니지만...
길상호 / 겨울 가고 나면 따뜻한 고양이 / 걷는사람 / 171쪽 /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