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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5시간전

세라 워터스 《리틀 스트레인저》

유한계급의 몰락 그리고 이성과 몽상  사이의 미스터리한 힘겨루기...

  소설은 몰락하는 젠트리 계급인 에어즈 가문이 소유하고 있는 헌드레즈홀을 배경으로 진행된다. 젠트리는 ‘14~15세기경에 생겨나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두터운 층을 형성한 영국의 계급으로, 귀족은 아니지만 가문 휘장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받은 자유민’을 의미하는데 세계대전이 끝난 20세기 무렵에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젠트리 계급은 젠틀맨, 젠트리피케이션 등의 어휘에 그 흔적을 남겨두고 있다.) 


  “... 어깨까지 내려오는 연한 갈색 머리칼은 잘만 관리하면 꽤 예쁠 것도 같은데 한번도 단정히 꾸민 모습은 보지 못했다. 그날도 흡사 세탁비누로 감은 다음 빗질을 잊은 것처럼 부스스했다. 게다가 그렇게 패션 감각이 없는 여자는 난생처음 봤다. 남성용 같은 플랫샌들에 옷맵시가 영 나지 않는 옅은 색 원피스는 튼실한 엉덩이와 커다란 가슴을 전혀 살려주지 못했다. 담갈색 눈은 너무 이마 쪽으로 올라붙었다. 얼굴이 길고 턱이 각져서 옆모습이 나부죽했다. 내 생각에 그나마 괜찮은 건 그녀의 입이었다. 놀랄 만큼 크고 선이 예쁜 입은 표정이 풍부했다.” (p.22)


  세계대전 중에 군대의 숙소로 사용되었을만큼 커다란 헌드레즈홀이지만 이제 저택에는 에어즈가의 가장 어른이라고 할 수 있는 에어즈 부인과 그녀의 딸인 캐롤라인 아들인 로더릭 그리고 저택의 운영을 돕는 베이즐리 부인과 입주 하녀인 베티만이 머물고 있다. 소설의 일인칭 주인공이 나, 닥터 패러데이는 유모로 일한 엄마 덕에 여섯 살에 이 저택을 방문한 적이 있고, 그때 벽에서 도토리 문양을 떼어 내 집으로 가지고 간 기억이 있다.


  “... 오버코트를 입고 트위드캡을 쓰고 가죽 크로스백을 멘 그는 여전히 지방의 젊은 젠트리 청년다운 모습이었지만, 걸음걸이라든가 올려세운 목깃, 11월의 찬바람 탓이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구부린 어깨가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고 힘들어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거리 맞은편에 차를 세우고 내린 다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흠칫 놀란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순간이었지만, 장담컨대 그는 분명 쫓기는 듯 겁먹은 표정이었다.” (p.222)


  그런 의미에서 닥터 패러데이가 이 몰락해가는 가문의 마지막 주치의가 된 것은 우연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다른 의사를 대신하여 저택에 들렀다 자신의 엄마가 찍힌 사진을 선물로 받게 되고, 어린 시절을 떠올린 이후 헌드레즈홀은 그에게 각별해진다. 하지만 내가 주치의 역할을 하게 된 이후 헌드레즈홀에서는 남은 에어즈 가문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을만큼 기이한 일들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이 집에 뭔가 있어요. 나는 알아요. 로드가 병든 이후로 줄곧 알았지만, 직시하기가 겁났어요······ 전에 마지막 낙서를 발견했을 때 어머니가 하신 말씀도 줄곧 머릿속에서 맴돌았어요. 어머니는 이 집이 우리의 약점을 다 꿰고서 하나씩 시험해보는 거라고 하셨죠. 로디의 약점은 알다시피 이 집 그 자체였어요. 내 약점은······ 그래요, 아마 내 약점은 지프였겠죠. 그런데 어머니의 약점은 수전이에요. 이건 마치―낙서도 발소리도 목소리도 그렇고―마치 어머니를 못살게 구는 것 같아요. 뭔가가 어머니를 놀리는 것처럼.” (p.504)


  나는 그 사건들의 수습 과정에 깊숙이 관여하게 되고, 그런 과정 속에서 캐럴라인을 향한 연모의 감정 또한 커져간다. 캐럴라인 또한 헌드레즈홀에서 벌어지는 설명 불가능한 일들을 앞에 두고 점차 페러데이에게 의지하는 마음이 커진다. 그리고 결국 두 사람은 결혼을 하기로 약속 한다. 캐럴라인의 남동생은 정신병원에 갇히고, 에어즈 부인은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이후의 일이다. 그리고 그 결혼 약속을 결국 지켜질 수가 없게 된다. 


  “... 내 정신은 온통 캐럴라인에게 쏠려 있었다. 나는 그녀가 또 한번 무언가의 뿌리를 쿡쿡 찌른 뒤 허리를 펴고 손을 닦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가 코트 허리띠를 고쳐 매는 모습을 보았고, 한 발을 다른 발에 가볍게 부딪쳐 신발 뒤축에 묻은 진흙 덩어리를 떨어내는 모습을 보았다.사실 한 번도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지 않았는데도 그녀의 모든 움직임이 다 보였다. 흡사 그녀가 자신만 보게 하는 제3의 눈을 뜨게 한 것 같았다. 그래놓고 일부러 무심하게 굴다니, 그 눈이 속눈썹에 찔린 듯 아렸다.” (p.409)


  소설은 칠백 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지만 굉장한 속도로 읽어나갈 수 있다. 세라 워터스의 이전 소설들과 다르게 동성애가 등장하지는 않는다. 계속해서 미스터리한 사건이 발생하고 등장 인물들의 행동이 속시원하지 않아 모든 수수께끼가 풀리는 대단원을 기대하게 되지만 작가는 그러한 기대를 저버린다. 그렇다고 찜찜한 마무리였다고 나무라게 되지는 않는다. 소설을 모두 읽고 나면 꺼림칙하기보다는 골똘해진다. 


  “... 실리의 견해에 따르면, 에어즈가 사람들은 시대에 맞춰 나아가지 못하고, 그저 은둔―자살과 정신이상―을 선택한 것에 불과하다. 영국을 한 번 둘러보라고 그는 말한다. 유서 깊은 상류층 집안이 십중팔구 똑같은 식으로 사라지고 있다... 나는 실리가 말했던 또하나의 가설, 좀더 기묘한 가설을 한 번도 그에게 상기시키지 않았다. 헌드레즈와 관련된 누군가의 불안정한 무의식이 낳은 사악한 씨앗, 탐욕스러운 그림자, 어떤 낯선 존재, ‘리틀 스트레인저’에게 이 집 자체가 잡아먹혔다는 가설 말이다...” (p.707)


  역사적인 면에서 소설은 산업화 사회에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한시적이었던 유한계급을 다룬다. 앞으로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될 전문가 그룹이 어떻게 등용되는지를 보여준다. 소설은 도래할 미래를 향한 이성과 지나온 과거에 기대는 몽상 사이의 힘겨루기를 담고 있기도 하다. 소설에 승자는 없고 모두가 패자일 뿐이다. 어쩌면 유일한 승자는 저택 헌드레즈홀일 수 있고, 범인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세라 워터스 Sarah Waters / 리틀 스트레인저 (The Little Stranger) / 문학동네 / 715쪽 / 2015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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