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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11시간전

박준 《계절 산문》

해 바뀜을 외면하고자 부러 빠르게 카운트다운 해보았자...

*2022년 1월 1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아내와 나란히 미용실에 들렀다. 새해 첫날 머리나 정리하자 하여 어제 예약을 했다. 미용실에는 부부인 두 명의 원장님이 있고 보통 나는 남편 쪽에 아내는 아내 쪽으로 같은 시간에 예약을 한다. 미용실 문을 열자 손님이 가득하여 두리번거렸고, 아내 원장님의 손님이 많아 아내는 집에 갔다가 삼십 분쯤 다시 오기로 하였다. 나는 잠시후 남편 원장님의 앞 손님이 떠난 자리에 앉았다.


  “나 앞머리 자른 거 모르겠어? // 오늘 처음 봤을 때부터 알고 있었어, 잘 어울려 // 야, 사람이 말할 때 좀 진심을 담아서 해야지 // 사실 말하기 전까지는 진심이었어” (p.81, 무렵)


  1월 1일인데도 사람이 많네요, 라는 물음에 남편 원장님은 토요일이고 빨간 날이니까요, 라고 대답했다. 해가 바뀐 첫날인 1월 1일이라는 것은 손님의 많고 적음에 영향을 끼치지 않고, 토요일이고 게다가 모두가 쉬는 공휴일이니 손님이 많다는 말이었다. 덧붙여 만약 오늘 같은 날 머리나 깎아 볼까, 하는 생각이 든다면 그런 날은 미장원에 오지 않는 게 낫다고 덧붙였다. 많은 사람이 그리 생각할 테니, 라는 의미일 것이다.


  “온갖 무렵을 헤매면서도 // 멀리만 가면 될 것이라는 믿음 // 그 끝에서 우리는 // 우리가 아니더라도” (p.21, 입춘)


  어제 자정을 전후하여 아내와 나는 잠시 텔레비전을 틀어 카운트다운 하는 것을 보고 해가 바뀌는 것을 확인한 다음 서로를 향하여 복 많이 받으라는, 되도록 아프지 말자는 덕담을 주고받았다. 오래전에는 바뀐 해에 서로가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 적어서 교환하고는 했고, 그 다음에는 말로 서로에게 원하는 것을 통보하고는 했는데, 이즈음에는 그마저 그만두고 짧은 덕담으로 새해 인사를 마무리한다.


  “불행이 길도 없이 달려올 때 / 우리는 서로의 눈을 가려주었지” (p.25, 세상 끝 등대 4)


  해가 바뀌는 것에 대하여 감응의 정도가 점차 떨어지고 있다. 어제 아내는 명실 상부 우리 두 사람 모두 오십줄에 들어섰다고 말해 주었다. 나는 너도 이미 오십이 아니었느냐고 말하자 만으로는 그렇지 않았다고 했다. 아내와 나의 나이를 손으로 꼽아 보았지만 입 바깥으로는 꺼내지 않았다. 나이듦이 여러모로 불편함을 양산하는 나이에 접어 들자 해가 바뀌는 사실을 외면하고 싶어지곤 한다.


  『정확하게 말하는 것을 늘 꿈꾸지만 가끔은 부정확한 말하기가 반가울 때도 있습니다... 며칠 전 기념일을 맞은 부모님을 모시고 고즈넉한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는 “구름은 왜 하늘에 떠 있을까?” 하고 혼잣말을 했습니다. 이 말의 본뜻은 대기 환경에 관한 질문이 아니라 방금 식사를 한 식당이 마음에 들었다는 의미에 가까웠습니다. 그 말을 들은 어머니는 “그럼 구름이 하늘에 떠 있지, 땅으로 내려오냐” 하고 답을 했는데 이 역시 본뜻은 ’오늘을 기념해주어서 고맙다‘라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저는 두 분의 대화를 이어 구름과 수증기 그리고 강과 바다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쭙잖은 지식을 늘어놓은 제 말들의 본뜻은 ’뭐 이런 것으로 고마워하시냐, 아무것도 아니다‘였습니다. 돌아오는 길 어느새 한결 부드러운 바람이 불었습니다. 이 뜻은 말 그대로 부드러운 바람이 불었다는 것입니다.“ (p.127, 구월 산문 중)


  오늘 백민석의 《과거는 어째서 자꾸 돌아오는가》를 모두 읽었고, 다음에 읽을 책을 고르는 중이었다. 내 삶이 지향하고자 하는 바를 떠올리며 장석주의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를 읽을까, 아니면 대선을 앞둔 시점이니 김영민의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정치적 동물의 길》을 읽을까 고민 중이었는데, 이 리뷰를 쓰다가 파스칼 브뤼크네르의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를 읽기로 결정하였다. 



박준 / 계절 산문 / 달 / 182쪽 / 202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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