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주에부는바람 5시간전

앨런 홀링허스트 《스파숄트 어페어》

공간의 묘사 사이사이에 한 획으로 그어지는 인물들을 따라...

  “길은 검은 협곡처럼 변해 있었고 목탄 같은 하늘을 등진 길 가장자리의 박공널과 굴뚝은 우리에게만 보였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구름이 지상의 불빛을 가져다가 하늘에 흩뿌렸지만 등화관제 때는 오로지 어둠만이 그득했다. 수백 번이나 걸어 다녔기에 잘 안다고 생각한 거리였지만 우리가 지나치는 출입구와 창문, 난간의 흐릿한 단서들이 기억과 좀체 일치하지 않는 듯했다. 질에게 공부에 대해서 물으니 의식하는 기색이 금세 덜해졌다. 그녀는 역사책을 읽고 있지만 고고학과 런던 공습으로 밝혀진 놀라운 사실들에 더 관심이 있다고 말했다...” (p.19)


  공간에 대한 묘사로 심리에 대한 묘사를 대신하는 능력을 높이 사고 싶다. 앨런 홀링허스트의 소설에 포진하고 있는 많은 묘사는 그런 식이다. 지루하다 싶을 만큼 눈에 보이는, 인공의 것이든 자연의 것이든 가리지 않고, 그 공간을 또렷하게 묘사하는 데에 충분히, 아주 충분히 페이지를 할애한다. 바로 거기에 있는 것처럼 바로 거기를 향하여 내가 움직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느껴질 지경이다.


  “... 오르막길 도로의 정면에, 활 모양으로 낮게 솟은 탑 두 개가 보였다. 강과 웨일스 해안선에 내린 실안개 속에서, 두 개의 하얀색 포물선이 떨어져 내리며 입을 맞추었다... 그는 이반이 뿌듯해하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반은 지도를 보다가 얼굴을 들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스케치 같던 풍경은 건축물로 변했다. 애매한 비율 때문에 절묘해 보였다. 좀 더 가까워지자 탑의 키가 두드러졌고 세부 양식을 갖춘 장소로 변했다...” (p.366)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공간의 묘사의 틈바구니에 은근슬쩍 등장인물을 밀어 넣는 작가의 방식이다. 얼마나 은근한지 쉽사리 알아차리기 힘들 지경이다. 그렇게 공간과 인물이 한 획에 그려지는 것만 같다. 거대한 자연의 풍광에 무심하고 작은 인물이 덧붙여져 있는 동양화를 보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과 인간이 동떨여져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고 어울리는 그런 잘된 그림 같다. 


  『“피터 코일 알지.” 그가 나를 보지 못해서 다행이었다. 스파숄트 스캔들이 불시에 튀어나온 것은 처음이라 얼굴이 빨개졌기 때문이다. “왜 물어?”

“나를 그리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이제 스케치가 아니라 회화로 그리고 싶대요.”

“승낙하면 좋겠는데.”

그가 아래층 조명 스위치를 더듬거리는 동안, 잠시 대화가 끊겼다. “동성애자인 것 같아요.” 그 단어 자체가 그에게는 일종의 실험인 듯했다.

“피터? 그래. 하지만 넌 충분히 자신을 지킬 수 있겠지.”』 (pp.72~73)


  소설은 앨런 홀링허스트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동성애라는 사랑의 방식을 택하고 있는 등장 인물들을 많이 다루고 있다. 세계 대전의 와중인 1940년, 옥스퍼드 대학에 데이비드 스파숄트라는 한 학생이 등장한다. 조정 선수이기도 한 그를 향한 보이지 않는 구애의 손길이 빗발치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나는 그 중의 한 명이기도 하면서 그들의 조정자 같기도 하다.


  “... 이상한 일이지만 루시에게는 할아버지가 셋 있었다. 조지 경, 우나의 아버지 로이 데이비, 거의 만나지 못하는 아빠의 아버지 데이비드 스파숄트. 아머지가 다른 오빠, 토머스의 할아버지까지 치면 네 명이었다. 토머스의 아빠는 마요르카섬에서 루시의 아빠처럼 남자랑 사는데 못 말리는 술주정뱅이였다. 루시는 호기심이 강했지만 가족 관계가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답을 찾지 못했다...” (p.431)


  《스파숄트 어페어》는 여러 면에서 2011년에 출간된 작가의 다른 작품인 《이방인의 아이》와 궤를 같이 한다. 세계대전의 와중에 소설이 시작되는 것도 그렇고, 대략 세 새대를 넘나드는 시간 동안 진행되는 스토리 진행 방식도 그렇다. 이 소설에서 데이비드 스파숄트는 첫 번째 챕터에서 은근하게 등장한 이후 아들인 조니, 그리고 조니의 딸인 루시에게로 바통을 넘긴다. 스파숄트는 과거의 추문으로 (소설의 원제는 The Sparsholt Affair 이다) 아니 과거였기 때문에 추문일 수밖에 없었던 사건으로 계속 거론될 뿐이다.


  “에버트의 뇌졸중은 크게 두 가지 결과를 낳았다. 단기 기억 능력이 손상되어서 분명한 목표와 주제로 대화를 시작하더라도 이내 망망대해를 떠돌았다. 그는 사실이나 단어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부드러운 하얀색 사각형이 보인다고 했다. 마음의 눈 속에서 밝은색 창문 모양의 창백한 여백이 둥둥 떠다니는 것이었다. 나머지 하나는 더욱 놀라운 일인데, 바로 걱정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결정과 계획에 따르는 걱정뿐만 아니라,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불러일으키는 걱정조차 하지 않았다...” (pp.460~461)


  전체적인 소설의 진행 시간이 길다보니 많은 등장 인물이 등장한다. 챕터가 넘어갈 때 시간의 점프가 심하다보니 새로 등장하는 인물과 과거의 인물을 잘 구분해야 한다. 하나의 세대가 다음의 세대로 넘어가는 과정을 잘 따라가야 한다. 그래서 되도록 짧은 시간에 소설을 모두 읽기를 권한다. 하지만 이전 소설도 그렇고 (900페이지에 가깝다) 이번 소설도 그렇고 (600페이지가 넘는다) 만만치 않은 분량이다. 



앨런 홀링허스트 Alan Hollinghurst / 정지현 역 / 스파숄트 어페어 (The Sparsholt Affair) / 민음사 / 637쪽 / 2021 (2017)

매거진의 이전글 카르스텐 두세 《명상 살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