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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4시간전

세라 워터스 《티핑 더 벨벳》

빅토리아 시대를 관통하는 굴 아가씨의 천진난만과 우여곡절...

  세라 워터스의 《핑거스미스》를 읽은 것이 2007년이다. 소설은 2016년 박찬욱에 의해 <아가씨>라는 영화로, 식민지 조선을 배경으로 하는 새로운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핑거스미스》는 세라 워터스의 빅토리아 시대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세라 워터스는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첫 번째 작품 《티핑 더 벨벳》을 1998년에, 두 번째 작품인 《끌림》을 2000년에, 《핑거스미스》를 2002년에 발표했다.


  “키티 버틀러를 보면, 마치······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마치 내가 지금까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산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몸에 뭔가 가득 차오르는 느낌이, 와인이 들어 있는 와인 잔이 된 듯한 느낌이 들어. 키티 버틀러 앞의 공연들도 보았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먼지와도 같아. 그러다가 마침내 키티 버틀러가 무대로 걸어오면······. 그 여자는 너무 예뻐. 옷도 무척 멋지고, 목소리는 아주 달콤해. 키티 버틀러를 보고 있으면 울고 웃고 싶어져. 동시에 말이야. 그리고 날 아프게 해, 여기를.” (p.31)


  《티핑 더 벨벳》의 주인공은 굴로 유명한 윗스터블에서 굴 식당을 운영하는 애슬리 가의 둘째 딸인 낸시이다. 애인으로 알려진 남자가 있고 식당에서 굴을 까며 평범한 생활을 하던 낸시는 어느 날 연예장에서 공연을 하는 남장 여가수 키티 버틀러를 발견하면서 인생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가수와 팬의 사이로 시작된 둘의 관계는 점차 발전하고, 낸시는 키티와 함께 윗서터블을 떠나 런던으로 향하게 된다.


  “아마 내가 남자로 세상에 돌아온 뒤 그런 눈길은 아주 많았으리라. 그러나 나는 한 번도 그런 것을 알아차리거나 그런 눈길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 뜻을 아주 잘 알았다. 그리고 그러면서 만족감과 원한으로 다시 몸을 떨었다. 나는 처음에는 남자들 눈을 피하기 위해 바지를 입었지만 오히려 <이런> 남자들, 내가 자기들과 같은 <그런> 사람이라고 여기는 남자들의 시선을 끄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난처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좀 묘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키티와 월터에 대한 <복수>가 된다는 생각이었다.” (p.262)


  키티 버틀러는 매니저인 월터 블리스에게 발탁되었고 낸시는 키티의 의상 담당으로 합류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한 발 나아가 낸시는 키티와 함께 남장을 하고 공연을 하게 되는 위치에 서게 된다. 동시에 낸시는 자신의 성정체성을 깨닫고 키티와 한 방에서 생활하며 행복한 시기를 보내게 된다. 하지만 키티가 매니저인 월터와의 결혼을 공식화하면서 낸시는 두 사람을 떠나게 되고, 거리에서 남장을 한 여자인 채로 남창의 생활을 하게 된다.


  “어쨌건 살다보면 불만스러운 과거를 버리고 새로운 미래로 방향을 바꾸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캔터베리 궁전에서 키티가 나에게 장미를 던지고 그 장미로 인해 키티에 대한 동경이 사랑으로 바뀌던 그날 밤이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이번은 또 다른 순간이었다. 어쩌면 그 순간은 이미 지나갔던 것이리라. 아마도 내가 내 삶을 진짜로 시작하게 된 순간은 거리에서 날 기다리는 마차의 어두운 심장부로 들어가던 순간이었으리라. 어찌 되었든, 나는 이제 내가 이전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요정은 마침내 병에서 나왔다. 그리고 나는 쾌락을 골랐다.” (p.323)


  그 거리에서 다이애나를 만나면서 낸시는 다시 한 번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다이애나는 한 눈에 낸시의 성정체성을 알아보고 그녀를 꾄다. 거대한 저택의 소유자인 다이애나는 이제 낸시를 자신만의 창녀로 삼고, 낸시는 그렇게 500여 일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노예와도 같은 생활은 한 순간에 파탄이 난다. 낸시가 다이애나의 하녀인 제나와 육체적 관계를 맺은 바로 그날 다시 거리로 내몰리게 된 것이다. 낸시는 다이애나의 저택으로 들어가기 직전 만난 적이 있는 사회 운동가 플로렌스의 집으로 무작정 찾아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플로렌스 남매와 함께 생활하며 서서히 회복되어 간다.


  “... 한때 나는 평범한 여자였다. 그리고 다시 평범해질 수 있었다. 평범해진다는 것은 사실 일종의 휴가가 되어 줄 터였다. 나는 최근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그리고 플로렌스를 힐긋 보고는 플로렌스가 꽤 평범한 여자라는 생각에 (예전에 기뻤듯이 이번에도) 기뻤다. 플로렌스는 손수건을 꺼내 코를 닦았다. 이제 플로렌스는 스토브에 주전자를 올려놓으라고 랠프에게 외쳤다. 한때 내 욕망은 맹렬히 일어나 나를 절박한 쾌락으로 몰고 갔었다. 하지만 나는 플로렌스는 결코 그런 욕망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너무 여린 내 심장은 한때 딱딱하게 굳어 버렸고 최근에는 더욱 딱딱해졌으며, 퀼터 스트리트에서 그 심장이 부드러워질 일은 전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p.480)


  ‘티핑 더 벨벳’은 빅토리아 시대의 레즈비언 은어로, 여성 성기를 입술이나 혀로 자극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세라 워터스는 박사 학위 논문으로 빅토리아 시대의 게이와 레즈비언에 대해 쓰는 과정에서 이 소설을 생각하게 되었다. 소설에는 그 빅토리아 시대에 횡행하였던 은어와 외설스러운 분위기가 생생하다. 빅토리아 시대의 성적 억압이라는 공식은 편견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근엄한 시대일수록 성적 이중성이 극에 달한다는 반증이라고 해야 할까, 흥미롭다. 



세라 워터스 Sarah Waters / 최용준 역 / 티핑 더 벨벳 (Tipping The Velvet) / 열린책들 / 629쪽 / 2009, 2020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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