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주에부는바람 Aug 03. 2024

천운영 《쓰고 달콤한 직업》

입맛이 보수적인 나도 입맛이 자유로운 아내도 잘 먹었다...

  아내는 내 입맛이 매우 보수적이라고 몇 번이고 말했다. 나는 수롭지 않아 했는데, 재작년 베트남 여행 중 그것을 절감했다. 여행 내내 리조트의 식당에서 내놓은 음식을 먹었고 돌아오는 날 한국 식당에 들렀는데, 그곳에서 보쌈을 찍어 먹었던 새우젓의 짠맛에 눈물을 흘릴 뻔하였다. 여행 동안 음식을 먹지 못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익숙하지 않은 맛들에 내내 움츠리고 있던 혀의 미각이 갑자기 살아나자 저절로 울컥, 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자주 물어온다. 어쩌다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느냐고. 처음에는 운명적인 이유들을 댔던 것 같다. 운명적인 계란 프라이. 15년간 함께 살던 반려견이 죽었고, 늘 함께 있을 거라 여겨 무심하게 방치해두었던 순간들을 후회했고, 그러다 문득 생을 마감하기 직전 내가 내민 계란프라이를 맛있게 먹어주던 순간이 떠올랐고, 그렇게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내가 조금이라도 덜 미안하도록 배려해준 심사가 눈물 나게 고마웠고, 그래서 불현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나 사람들에게 밥을 차려줘야겠다고 결심했고, 이왕 밥을 차려줄 거 돈을 받고 차려주자, 그렇다면 식당을 하는 게 좋겠다, 그래 해보자. 대략 이런 과정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이유가 희미해졌다. 정말 계란프라이 때문이었을까. 대체 뭐에 씌어서 이 일을 시작한 걸까. 뭐에 홀려도 단단히 롤린 게지. 그게 아니고서야. 그래서 누가 똑같이 물어오는데도, 글쎄요, 어쩌다보니, 그러게 말이어요 왜 그럴까요, 대답도 아닌 대답을 해오면서 대답을 회피해왔다. 무언가를 찾아 나섰는데 헤매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든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통해 새로운 근육을 만들고 있는 중이라든가. 그저 누군가에게 밥을 해 먹이고 싶었다든가. 시간이 지날수록 대답은 궁색해지고, 궁색해질수록 미궁에 빠졌다.” (pp.39~40)


  내 느낌을 전하자 아내는 고작 5일 만에, 라며 헛웃음을 지었지만 나는 혼자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기분 좋게 식사를 마쳤다. 그러고 보니 아내와 처음 연애를 하던 시절에 먹던 과자가 아직도 가장 선호하는 과자의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실은 아내와 사귀기 이전에도 그 과자를 좋아했다. 반면 아내는 새로운 음식과 마주치는 일에 거침이 없다. 도전하고 익숙해져서 이제 고수는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채소가 되었다.


  “발목에 단도를 찔러 넣었을 때의 전율이 기억난다. 바람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쉬익. 이어서 가죽 안에 갇혀 있던 기름이 쏟아져 나왔다. 껍질을 들어내고 누르스름한 지방층을 벗겨내자 분홍빛 지방이 나타났다. 그때부터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었다. 한 조각 바람의 세계. 한 조각 숲의 세계. 돼지와 돼지가 먹은 도토리와 도토리를 키워낸 나무와 나무를 키운 땅과 바람과 태양.


  하몽은 부위에 따라 자르는 방식에 따라 다양한 맛이난다. 부드럽거나 쫄깃하거나 기름지거나 담백하거나. 하몽을 자를 때면 나도 모르게 입술을 모으고 집중하게 된다. 하몽을 이루고 있는 근육과 지방과 살과 그 외의 모든 것. 하몽 그 자체에. 그렇게 골똘히 하몽을 자르고 있으면 진짜 위엄 있는 기술자가 된 기분이 들기도 한다.” (pp.55~56)


  아내는 정해진 루틴에 따라 생활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음식은 낯선 것이 갑작스럽게 등장하여도 두려워하지 않고 섭취한다. 반면 나는 루틴에 적응하는 것을 일종의 굴욕처럼 여겼지만 (그래도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다) 음식은 몇몇 정해진 것들에서 벗어나면 금세 어색해하고 만다. 음식을 고르는 일에서 크게 결정 장애를 일으킨다. 서울의 서쪽으로 이사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와 연희동에 나갔는데, 식당을 고르지 못하여 그만 프렌차이즈 죽집에서 식사를 했다.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혀를 찼다. 


  “여기서 질문이 나온다. 처음이자 종국의 질문. 왜 (이) 소설을 쓰는가. 다른 작가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이해하고 싶어서 쓴다. 무언가를. 나를, 누군가를, 관계를, 현상을, 세상을. 하지만 이해하기 어렵다. 애를 쓴다. 애를 쓰고 쓰다보면 소설이 마무리된다. 완성된 소설은 말한다. 전부 다 이해할 수는 없다는, 바로 그 사실을. 다시 쓴다. 조금 더 이해하기 위해 한 번 더. 좌절의 연속. 그렇게 20년 넘게 소설을 써서 알게 된 것은 너무나 미미하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 아주 조금 더 알게 되었다는 것. 세상은커녕 나를 이해하는 데에 이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다니. 그래도 소설을 씀으로써 알게 되고, 그래서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p.98)


  돈키호테의 식탁,은 그렇게 우리가 들렀던 연희동의 죽집에서 멀지 않은 연남동에 위치해 있었다. 돈키호테의 식탁,이 있는 근처의 멘보샤 맛집에서 선배들과 모임을 가졌던 기억이 있다. 돈키호테의 식탁,이 문을 닫은 다음 그 근처를 더 많이 지나다니게 되었다. 아내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집을 출발하여 상암동의 수영장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연남동을 거쳐 연희동에서 식사를 하고는 했는데, 연남동에서 연희동으로 나아갈 때 돈키호테의 식탁,이 자리했던 골목을 지나쳤다.


  “지난여름 그의 밥상에는 반찬 세 가지만 올랐다. 오이지, 짠지, 새우젓. 그의 말대로 삼엄한 밥상, 정갈한 밥상이다. 물에 만 밥을 한 숟가락 떠 그 위에 오이지나 새우젓 하나를 얹어 먹는다. 딱 하나씩만. 그렇게 먹으면 배 속이 맑아진다고 했다. 밥을 먹었는데도 배가 고프다는 느낌을 유지할 수 있는 정도. 안 먹어도 먹은 느낌. 먹었는데도 안 먹은 느낌. 그 상태여야 사물이 맑게 보인다고, 잡것이 없는 상태가 된다고 했다...” (p.284, <소설가 김훈을 이루는 맛> 중)


  돈키호테의 식탁,이 문을 닫기 전에 딱 한 번 식사를 한 적이 있다. 천운영 작가(이며 돈키호테의 식당의 주인장)와 동창이었던 아내, 그리고 또 다른 이가 한 명 더 있던 자리였다. 학창시절에 아내와 천운영 작가는 꽤 친하였지만 그로부터 이십여 년이 너머 시간이 흐른 다음이었다. 아마도 시금치 또르띠야와 하몽과 또 무언가를 먹었고 술을 조금 마셨다. 입맛이 보수적인 나도 입맛이 자유로운 아내도 잘 먹었다.



천운영 / 쓰고 달콤한 직업 / 마음산책 / 299쪽 / 2021 (2021)




매거진의 이전글 요조 《실패를 사랑하는 직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