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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06. 2024

성석제 《말 못하는 사람》

명절 전날 자전거를 타고, 연남동 기찻길 옆 서점을 거쳐 카페에서...

*2020년 2월 8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추석과 설, 매해 두 차례의 명절 의식에 소요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처음에는 부모님이 계시는 대전으로 우리 부부, 동생 내외, 사촌 형님 내외가 집결했다. 명절 하루 전날에 모여서 종일 음식을 만들고, 설거짓거리를 만들고, 그 음식을 열심히 먹고, 다시 설거짓거리를 만들기를 반복했다. 아버지는 집안의 가장 어른이 되어서 이 모든 행위를 한발 떨어진 자리에서 느긋하게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가방에 들어가시면 아들들은 밖에서 지퍼를 닫아버린다. 이로써 아버지는 아버지로 정형화되고 운반과 가공이 가능해지며 아들들은 언제나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지금 아버지가 되고 보니 아버지는 아들에게 가방에 들어가주는 척하는 존재인 것 같다. 그럴 때 뒤돌아보지 말아야 하는데. 알고 있다고, 알지만 그렇게 한다고 잘난 척하지 말아야 하는데, 내 아버지가 그랬듯이.” (p.21)


  어느 해부터 사촌 형님 댁으로 명절 행사가 옮겨졌다. 사촌 형님은 돌아가신 큰아버지의 아들이다. 우리 부부는 부모님을 모시고 명절 하루 전날 사촌 형님이 사는 부천으로 이동했다. 동생 내외가 우리 뒤를 따라 도착했다. 음식을 만들고 설거짓거리를 만들고 음식을 먹고 설거짓거리를 만드는 루틴은 장소가 바뀌었어도 여전했다. 명절 음식을 모두 만든 다음 아내와 나는 형님 댁 근처에 있는 시장으로 나들이를 가고는 했다.


  몇 해 전부터는 다시 부모님 댁에서 명절 행사를 치르고 있다. 이제 사촌 형님 내외는 함께 하지 않는다. 사촌 형님은 딸과 사위와 손주와 아들과 함께 명절을 보내고 명절 이전에 혹은 명절날 오전에 우리 부모님을 찾아온다. 우리 부부와 동생 내외는 명절 전날 부모님 댁에서 함께 음식을 만들고, 적당한 식당을 찾아 외식을 하고 헤어졌다가 명절 날 모여 아침을 함께 한다.


  “어쨌든 강의를 빼먹은 그 금쪽같은 시간에 나는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다. 그 대신 대학 안에서 내 나름으로 선택한 강의를 들었다. 솔숲과 노천극장의 노랫소리에서, 교내 곳곳에 피어나는 벚꽃과 진달래에서, 신록을 피워올리는 나무들의 소리 없는 노동에서, 연못 금붕어들의 표정에서, 학교 밖 포장마차의 젊은 여주인에게서, 안주를 만든다며 시장에서 사다 구운 고등어 냄새에서, 선배와 후배와 친구와 죽음과 삶의 교차, 이별, 무덤가의 꽃다발에서 위악과 방탕, 다방, 그리고 술, 술, 술에서 무언의 흔적 없는 학점을 얻었다.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팻말이 꽂혀 있는 잔디밭에서 경고를 거듭 무시하고 바둑을 두다 물세례를 받기도 했고 분수가 있는 연못에서 단체로 때를 벗기기도 했다. 청춘의 열정, 충돌, 절망과 혼돈이 주는 학점은 A, B, C, D, F가 아니라 눈물, 회한, 환희, 기쁨, 내출혈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물론 이런 과목은 만점도 없고 통지도 오지 않는다.” (p.46)


  명절 때 만드는 음식의 양과 종류는 해를 거듭할수록 줄어들고 있다. 부모님이 대전에 계실 때는 명절 잔날 정오 무렵에 도착한 며느리들은 그날 자정이 될 때까지 음식을 만들고 상을 차리는 일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부천 형님 댁으로 자리를 옮긴 다음에도 정오 무렵부터 저녁 여덟시까지 음식을 만들어야 했다. 올해 설에 우리 부부는 두 시쯤 부모님 댁에 도착했고, 네 시쯤 모든 음식 만들기를 끝냈다.


  음식을 만든 다음 아내와 나는 부모님 댁을 나와 따릉이를 타고 홍제천을 거쳐 연남동으로 향했다. 동생 내외가 부모님을 모시고 연희동에 있는 식당으로 오기로 했고, 그때까지 두 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아내와 나는 연남동 기찻길 옆에 있는 서점 리스본에서 각자 한 권씩 책을 구매했고, 식당에 가기 전에 카페에서 함께 책을 읽었다. 성석제의 《말 못하는 사람》은 아내가 고른 책이었다.


성석제 / 말 못하는 사람 / 문학동네 / 207쪽 / 201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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