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 《촉진하는 밤》
며칠 전부터 무명 가수가 부른 <살아야지>를 꽤 여러 번 듣고 있다. 투석을 마치고 잠에 취해 있는 중증 치매의 아버지를 요양 병원에서 암병원으로 암병원에서 다시 요양 병원으로 실어 날랐다. 일도 아니고 효도 아니고 효도 아니고 일도 아닌 어중간한 이동을 모두 마치고 이제 진짜 일하러 사무실로 돌아가는 내부순환로, 저무는 해를 향하여 한껏 미간을 찌푸리면서 <살아야지>를 들었다.
“조금만 더 그렇게 하면 예순이 되겠지. / 이런 건 늘 며칠 후처럼 느껴진다. / 유자가 숙성되길 기다리는 정도의 시간. // 그토록이나 스무 살을 기다리던 심정이 / 며칠 전처럼 또렷하게 기억나는 한편으로 // 기다리던 며칠 후는 / 감쪽같이 지나가버렸다.” - <며칠 후> 중
고유의 고요, 를 갖고 싶다. 때때로 반가운 정전, 불이 꺼지고 나면 작은 삶의 통로도 환하게 확인할 수 있을 터이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것을 배우고자 하였으니 허송세월, 감각이 사라져서 떠올리기 힘든 시간, 체리 맛이 나던 갈색 필터의 담배는 어떤 연기를 피웠더라, 번역되지 않는 나를 텍스트로 삼아 마시고 또 마시던 주류의 밤, 사라진 어처구니를 찾아 떠도느라 허공을 더듬는 손길이 아직 있다.
“열이 펄펄 끓는 너의 몸을 / 너에게 배운 바대로 / 젖은 수건으로 닦아주느라 / 밤을 새운다 // 나는 가끔 시간을 추월한다 / 너무 느린 것은 빠른 것을 이따금 능멸하는 능력이 있다 // 마룻바닥처럼 / 납작하게 누워서 / 바퀴벌레처럼 어수선히 돌아다니는 추억을 노려보다 / 저걸 어떻게 죽여버리지 한다 // ... 어제와 오늘 / 사이에 유격이 클 때 / 꿈에 깃들지 못한 채로 내 주변을 맴돌던 그림자가 / 눈뜬 아침을 가엾게 내려다볼 때 // 시간으로부터 호위를 받을 수 있다 / 시간의 흐름만으로도 가능한 무엇이 있다는 것 / 참 좋구나 // 우리의 / 허약함을 아둔함을 지칠 줄 모름을 / 같은 오류를 반복하는 더딘 시간을 / 이 드넓은 햇빛이 / 말없이 한없이 / 북돋는다” - <촉진하는 밤> 중
표류하고 있다는 호소문을 매일 저녁 작성한다. 어제는 이런 문구로 호소문을 시작했다. 쓰는 습관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있습니다. 나는 길이 없는 곳에서 길을 잃었다. 아니 길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발견하지 못한 길로 가득한 곳에서 길을 잃었다. 길을 발견하지 못하였으므로 나는 모든 갈림길에서, 그러니까 거기에 있는 줄도 모르는 갈림길에서, 삼거리인지 사거리인지 오거리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갈림길에서...
“어떤 시를 읽었다 / 아침에 날아든 소식으로 우두커니 앉아 있는 사람이 등장했다 / 그 자세로 밤까지 앉아만 있다가 그 사람은 홀연히 일어나 / 슬리퍼를 신고 현관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 어떤 소식이었을까 / 시가 말해주지 않은 것을 궁금해하며 / 나는 그 사람을 기다리기로 했다 / 그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 사람을 / 밤새 기다리다가 홀연히 아침이 와버린다는 것이 // 지금 쓰고 있는 이 시의 첫 연이 되었으면 한다 / 내가 쓰고 있는 이 시를 읽는 한 사람은 / 이 페이지를 쉽게 덮어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 더 궁금한 것 없이 다음 세계로 가뿐히 가버린다면 // ... 마라토너처럼 활달한 그의 목젖으로 / 이 시를 끝내게 되면 / 그런 시를 읽었던 것을 까맣게 잊게 될 것이다 / 내가 시를 쓰는 동안 내가 기다리던 // 그 사람이 나에게 왔다 / 그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 나는 시를 쓰느라 미처 몰랐을 뿐이었다” - <올가미> 중
후회하지 않는다. 아니 선택하지 않았으니 후회할 수 없다. 손가락으로 여기저기 가리켜본다. 보고 싶은 것을 가리키는 것인지 가리키고 났더니 거기에 그것이 있는 것인지 가늠해본다. 저 나무가 뭐야? 플라타너스잖아 양버즘나무, 아내의 질문에 의기양양한 대답을 내놓는 순간에만 잠시 삶이 확연해진다. 대부분의 시간에 삶은, 삶을, 서둘러 종점을 향하는 막차의 은퇴를 앞둔 기사처럼 운전한다.
“해 아래 오도카니 앉아 너는 / 묵은 표정을 씻고 있다 / 씻어낸 표정을 말리고 있다 // 해가 지면 밤이 오고 밤이 오면 별이 보이는 / 고요한 절차가 차곡차곡 쌓여갈 때에 / 고양이의 사뿐한 / 발소리가 또렷이 들려오고 // 너는 텐트와 침낭의 지퍼를 차례차례 닫고서 / 눈을 감고 기다린다 / 밤새우지 않은 아침이 너에게 다가간다 / 너의 오랜 소원이 너를 에워싸는 시간” - <백만분의 1그램> 중
누구에게도 구술되지 않는 삶은 허전할까. 나는 누구의 삶을 구술하고 나의 삶은 누구에 의해 구술될까. 나를 보고 등을 돌렸던 많은 시간, 도로 돌아가도 별 볼 일 없으니, 나는 바로 지금의 시간과 식구처럼 잘 지내고자 하는, 나는 이미 오래된 인간이다. 미안하기 싫은데 매일 미안한 인간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겸양의 밤, 모든 패거리를 분쇄하고 싶은 밤, 잔을 기울여 몽땅 흘려보내고 싶은 밤이다.
김소연 / 촉진하는 밤 / 문학과지성사 / 175쪽 /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