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 《웃어라, 용!》
틈에 서려면 사지에 힘이 있어야 한다. 힘이 빠지는 순간 서럽게 추락하고 어느 순간 틈이라는 이름의 문은 닫히고 만다. 죄다 허공에 남겨 놓고 허울만 떨어질 수도 있다. 부여 잡으려 해도 소용없다. 틈의 아래에서는 소용 있는 것들이 허락되지 않는다. 수가 없을까 골몰하여 보지만 어둠만으로도 벅차다. 더 이상 자라지 않는 줄기를 향하여 아무리 소곤거려도 빛이 없다.
시의 힘
꽃잎을 따먹고 자란 아이는 무쇠인간이 되었다
스스로 멈춰버린 심장의 입구는 연분홍빛
푸른 이파리가 사람의 눈을 막는 커튼으로 펄럭인다
꿀벌들이 쇠를 먹고 비행기의 노선을 일그러뜨렸다
여행자들이 도시의 수맥 속에서 서로 철퇴를 휘둘러
솟아오른 물기둥이 성벽을 쌓았다
겨울 햇빛이 꽃들의 회전력으로 성층권의 얼음을 엮어 유리 그물을 펼칠 때,
눈먼 자들의 자동차가 산소 속을 떠돌았다
올 것이라 믿었던 내일이 시계 속에서 한없이 뒤로 돌아
나비의 몸집이 거대해지고
강철을 씹는 나비의 이빨이 봄볕에 녹슬어갔다
꽃잎을 먹고 자란 시인은 무너진 콘크리트 잔해 속에서 쇠붙이들을 녹여 다음 세대의 골격을 가설하니
상한 칼날에 맺힌 녹의 형태가 기나긴 침묵의 서언(序言)이었다
천년 동안 힘을 모은 꿀벌이 시든 꽃들에게 절했다
세상의 모든 집이 아름다워졌다
삼계(三界)의 마지막 쉼터가 천국의 빗장에 독을 묻힌 거다
소리를 연결하려고 애쓴다. 작아졌다 커지고 밝아졌다 어두워지고 날아오르다가 가라앉는다. 고요하고 뭉클한 것들이 짜깁기된다. 그럴수록 징벌의 순간은 유예되고, 서글픈 마음만 갇혀 있다. 그녀의 둘레를 걷다가 지쳤던 마음이 반점으로 남아 있다. 반박의 파열음은 있어 본 적이 없다. 사각 지대는 없고 모래 수렁은 도처에 존재한다. 내가 빼앗긴 것들이 내가 빼앗은 것들을 감시한다.
“걸음은 늘 구름보다 느리고 / 구름의 형태는 그림자보다 더 느리게 당신에게 전할 말을 미리 공중에 새긴다 // 어제 한 말이 / 오늘 당신 머리 위에 떠 내일의 날씨가 될 것이다 / 오늘 되삼킨 말이 / 어제의 비를 적셔 한여름에도 겨울옷을 뒤적거리며 당신은 방황할 것이다” - <구름의 문양과 말의 기둥> 중
지금껏 넘어 온 시간들과 병합하려는 마음이 있다. 이고 진 마음의 너울이 산처럼 크고 들처럼 넓다. 잔가지가 만든 그림자는 덧없는 문자가 되고, 눈시울이 뜨거울까 빗장을 드리우지만, 해석의 여지는 형체를 잃은 바람처럼 빠져 나간다. 동네에는 길 잃은 까마귀 소리가 떠다니고, 콘크리트 처마 아래에서는 고양이들이 서로를 곤란하게 한다. 간섭과 교란의 낮이 끝나면 모든 통신은 마음 없이도 가능해진다.
“거뭇거뭇 나비의 그림자가 나비의 별채인 양, / 온몸 털 곧추세운 나비가 그 안에서 자신의 뇌수를 파먹고 // 나는 별들을 삼킨 이불 밑에 숨어 모든 걸 본다” - <나비 창세기> 중
서슬이 퍼런 티끌들이 떠다니던 오후에는 잠자코, 창틀에 튕긴 햇살이 만든 무늬에도 무심하였다. 만지려고도 핥으려고도 하지 않았고 포슬포슬 가라앉는 것들을 사실에 기반하여 내버려 두었다. 내가 챙길 수 있었던 몇 가지 색상만 기록해 두기로 하였다. 빨랫줄에 걸린 붉음, 고양이의 발걸음처럼 흰,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책들의 오락가락하는 검정, 갑자기 떠오른 기억 때문에 벌어진 사색...
“죽은 짐승을 삼킨 나무들이 걸어다닌다 / 꽃은 그들의 이빨, // 잇새에 멍울진 어느 산 짐승의 눈빛 // 오월에 퍼붓는 눈이 그렇게 빨갛다” - <기생수(奇生樹)> 중
거처를 잃은 것들의 거처, 축하할 일이 없는 경축일, 폐허 위로 반듯하고 정갈한 붕괴, 쇠락이 만들어내는 색다른 기색, 최초의 기세와 별다르지 않은 최후의 흉터, 부유하는 것의 수평 방향 추락, 죄다 자유로운 죽음의 통곡... 때로 분한 마음이 드는데, 그 마음의 정처가 없어 곤혹스럽다. 그럴 때 나는, 게워내거나 꿀꺽 삼킨다. 모든 것 같지만 아무것도 아닌, 필사의 정주定住 중이다.
강정 / 웃어라, 용! / 문학동네 / 123쪽 /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