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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Jul 28. 2024

조경란 외 《2024 제47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관계에 내재된 불안의 요소들을 모아...

  조경란 「일러두기」

  2024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은 조경란의 〈일러두기〉이다. 이혼을 하였고 아버지의 복삿집을 이어 받아 일하고 있는 마흔 일곱 살의 재서 그리고 재서의 복삿집에 USB를 맡겼던 반찬가게의 미용 사이를 그리고 있다. 두 사람의 관계는 굉장히 정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돈되어 있지 않은 어수선함으로 가득해 보인다. 소설을 읽다 오래전 기억의 한 토막이 떠올랐다. 당시의 여자 친구가 독서실의 총무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자리를 뺀 어느 학생의 락커에서 두툼한 노트를 발견한 것이다. 그 노트에는 소설이랄지 아니면 자서전이랄지 알 수 없는 내용이 가득했고, 우리 둘은 그 노트 혹은 그 노트의 내용을 어떻게 할 것인지 잠시 골몰하였다. 당시의 그 노트의 미스터리한 주인공을 미용이 닮아 있다.


  조경란 「검은 개 흰 말」

  “검은 개와 흰 말... 그것은 우리의 암호 같은 것이었다. 때로는 위로도 때로는 가벼운 농담으로. 불안은 언제나 발밑이나 허공, 어디에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삶의 파편들처럼 예기치 않게 찾아오며 그래서 타인의 이해를 받기도 구하기도 어려운 데가 있다. 실에게는 다른 것이 필요했다. 두려움을 완화시켜주거나 다른 대상을 떠올릴 만한 치환置換적인 행동 같은 것. 검은 개를 보는 감정을 돌려 세우는 일. 그리고 나는 실에게 말했다. 목줄이 풀린 크고 검은 개를 보면 그게 흰 말이라고 생각하자. 갈기도 희고 늠름하며 장애물을 뛰어넘을 수 있게도 해주는, 눈부신 흰 말.” (p.126) 불안증과 관련이 있다. 이모와 조카인 실(조경란 작가의 작명법이 독특하다)의 관계 또한 독특하다. 불안을 매개로 하는 안심의 관계라고나 할까...


  김기태 「팍스 아토미카」

  “... 혹자는 지난 만 년 동안 인간은 모두 전사거나 전사의 유족으로 살았고, 20세기 전반에는 두 번의 총력적능로 85,000,000명 이상이 사망했음을 상기시킨다. 그에 비하면 오늘날 ‘문명국가’의 다수 시민들은 화요일 밤에는 실시간 중계되는 가자 지구의 화염을 보고 목요일 정오에는 총기 난사범의 프로필을 듣더라도 일요일 오전에는 애인에게 단검이 아니라 커피와 토스트를 건넬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2차 세계대전을 끝낸 폭발 이후 현재까지의 시대를 핵에 의한 평화, 즉 ‘팍스 아토미카 Pax Atomica’라 부르기도 한다.” (p.156)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과학자드리 발행하는 회보의 표지에 등장하는 ‘지구 종말 시계The Doomsday Clock’에 의하면 2024년의 시계는 지구가 종말하는 자정으로부터 90초 전을 가리키고 있다고 한다. 조경란의 불안이 가족 내의 사적 불안을 담고 있다면 김기태의 불안은 전인류적 불안이다.

  

  박민정 「전교생의 사랑」

  나와 세리, 두 사람이 아직 성인이기 전에 함께 출연했던 영화 〈전교생의 사랑〉을 이제 성인이 된 두 사람이 처음으로 함께 보게 된다. 조금은 다른 길을 걸었고 걷고 있는 나와 세리이지만 영화에 출연할 당시의 어렴풋한 학대의 기억은 공유될 수밖에 없다. 작품 속에서 언급되는 영화의 원작이랄 수 있는 일본 영화 〈전교생〉은 1982년 작이다.


  박솔뫼 「투 오브 어스」

  소설에는 ‘움직임연구회’라는 것이 등장한다. ‘움직임연구회’는 ‘개개인의 움직임을 스스로가 이해하고 각자 원하는 움직임을 찾아가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건 그렇고 내가 요즘 자주 들락거리는 유튜브 채널은 ‘움직임 연구소’라는 채널이다. 이런 우연이라니.) 소설은 ‘움직임연구회’의 워크샵에서 만난 이들이 서로를 향하여 기대고 움직이는 모양을 띄엄띄엄 보여주고 있다.


  성혜령 「간병인」

  어머니가 유방암으로 돌아가신 이후 아버지는 딸인 나진에게 유방암 검사를 재촉한다. 그리고 유병을 대비하여 나진은 유방 절제술을 감행하기로 한다. 수술 이후 나진은 아버지가 소개해 준 미형을 간병인으로 두게 되는데, 그녀와 아버지의 관계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최미래 「항아리를 머리에 쓴 여인」

  “... 고용할 때의 약속과 달리 나는 시터 일 외에 다양한 방식으로 소모되었다. 함께 옹기마을에 가고, 예고 없이 받문한 서라 아빠의 친구들에게 인사를 했다. 애기 엄마로 불리거나 한식구처럼 보이는 건 시터 조건에 없었다. 선을 그어야 할 때를 한참 지나버렸다. 이 집에서 자고 가지 않는 건 내가 정한 마지노선이었다.” (pp.278~279) 하지만 나는 그 마지노선을 넘어 버렸다. 그리고 보지 않아도 좋을 것을 서라 아빠의 컴퓨터에서 발견하였고, 여전히 서라의 시터라는 일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조경란 외 / 2024 제47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 문학사상 / 315쪽 /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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