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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07. 2024

김혼비 《아무튼, 술》

그때는 부끄럽지 않았지만, 지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기 위해서는...

  처음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신 것은 재수를 할 때였다. 종합반에서 함께 공부하였던 고등학교 동창네 집에서 깨어나 겨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친구의 별명은 개구리였는데, 그 집에는 개구리 삼형제의 사진이 고리에 걸린 채로 아래로 주루룩 전시되어 있었다. 그 얼마 전 전화를 걸었을 때 그 아버지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전화를 받은 아버지에게 실수로 친구의 이름이 아니라 별명을 부르며 개구리 있어요? 라고 물었을 때 아버지는 이렇게 반문했다. 셋 중에 어떤 개구리?


  “그날은 손에 꼽을 정도로 술을 많이 마신 날이었다. 나는 술을 많이 마셔서가 아니라 자주 마셔서 술꾼인 부류라 주량은 그리 세지 않은데, 그날은 희한했다. 둘이서 1차에서 소주 네 병을 마셨고 2차에서 맥주 세 병을 마셨는데도 말짱했다. 심지어 가게가 파해서 2차를 끝내야 할 때가 되었는데도 술이 더 마시고 싶었다. 그날따라 간이 센 안주들을 계속 먹어서 간이 세진 것일까?” (p.75)


  김혼비라는 필명을 쓰는 (저자가 닉 혼비를 좋아하여 이런 이름을 쓴다고 하는데, 닉 혼비를 좋아하는 이를 만나 반가왔다.) 작가의 첫 번째 취한 술은 ‘수능 백일주’라고 하는데, 그때 작가는 스스로를 배추라고 우겨서 친구들을 아연실색케 하였다. 그리고 그때 비슷하게 취한 친구가 작가의 배추설에 크게 반응하여 싸움이 일어나는데, 결국 작가는 “나 이제 더 추워지면 곧 김치 돼. 김치가 된다고. 너 수능 만점 맞을 때 난 이미 김치일걸?” 이라고 대꾸함으로써 종지부를 찍는다.


  “... 술이란 건 참 시도 때도 없이 시제에 얽매이지 않고 마시고 싶다는 점에서나, 마시기 전부터 이미 마시고 난 이후의 미래가 빤히 보인다는 점에서나, 일단 마시기 시작하면 앞일 뒷일 따위 생각 안 하는 비선형적 사고를 한다는 점에서 너무나 헵타포드어 같지 않은가.” (pp.95~96)


  사실 책을 읽은 다음 곧바로 리뷰를 작성하지 않고 나는 때를 기다렸다. 그러니까 역시 이런 책이라면 어느 만취한 다음 날 리뷰를 쓰는 게 맞아, 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제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고, 좀처럼 만취의 술자리를 갖지 않는다. 마시면 3차는 기본이고 일주일이 8일인 양 마셨던 시절이 있었고, 그 시절은 십여 년 이상 지속되었는데 말이다.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도 없어 이렇게 적어내리고 있다.


  “솔직히 이번 주도 완패할 것이다···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오늘은 요가가 술을 이겼다. 무려 홍어회를 이겨내고 요가를 다녀온 것이다! 갑자기 강철 의지력이 생겨났을 리는 없고 어제 어미 질릴 정도로 많이 마셨기 때문이다. 역시 ‘오늘의 술 유혹’을 이길 수 있는 건 그나마도 ‘어제 마신 술’밖에 없다.” (p.104)


  이제는 일주일에 한 번, 일요일에서 월요일로 날이 바뀌는 시간에 전기현의 씨네 뮤직을 보면서, 오뚜기에서 나온 닭근위마늘볶음을 안주로 삼아, 소주와 맥주를 적당한 비율로 섞어 마시는 것이 나의 술자리의 전부이다. 그런데도 크게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한 달 전쯤 선배들과의 술자리에서, 실컷 마시고 실컷 놀아서 이제 더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더 놀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라고 실토한 바 있다. 


  『... 결국 발이 턱에 걸렸고, 순간 빙글, 앞구르기 하듯이 고꾸라지며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이문재 시인이 「바닥」이라는 시에서 그랬지. “모든 땅바닥은 땅의 바닥이 아니고 지구의 정수리”라고. 그러니까 이것은 지구의 정수리와 나의 정수리가 맞부딪치는 우주적 모멘트였던 것이다.』 (pp.127~128)


  《아무튼, 술》의 김혼비 또한 지금은 예전처럼 마시는 것 같지는 않다. 술을 마시며 만난 남편과 함께 살고 함께 술을 마시기는 하지만 예전만큼은 아닌 것 같다. 읽으면 포복절도할만한 술 에피소드들이 책에는 가득하다. 그 에피소드들을 읽으면서 그에 버금가는 에피소드들을 백 개쯤 떠올릴 수 있었지만 여기에 기록으로 남기지는 않기로 하였다. 그때는 부끄럽지 않았지만, 지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기 위해서는 술이 필요할 것 같기 때문이다.



김혼비 / 아무튼, 술 / 제철소 / 171쪽 / 201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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