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주에부는바람 Aug 07. 2024

심보선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우리가 상실한 것과 우리가 상실할지도 모를 것들 모두의 자리...

  “... 일상생활에서의 ‘깊이 생각함’이란, 느긋하게 산책을 할 때라면 한 송이 꽃을 보고도 쉽게 느낄 공통성의 기초를, 생존의 흐름에 내몰리고 휩쓸릴 때에도 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악이란 ‘망각을 선택함’이고 지옥이란 거듭된 망각 끝에 다다르는 종착지의 이름이다. 장담컨대 그 종착지인 지옥은 끔찍하기는커녕 너무나 평범한 세계의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할 것이다.” (pp.64~65)


  심보선의 시집을 몇 권 읽었다. 그렇게 내게 각인된 시인의 뉘앙스는 낭만의 감정을 멋지게 포장할 줄아는 고급스러운 손짓 같은 것이었다. 물론 “불평등이란 / 무수한 질문을 던지지만 제대로 된 답 하나 구하지 못하는 자들과 / 제대로 된 질문 하나 던지지 않지만 무수한 답을 소유한 자들의 차이다”라는 대목도 있었다. 《눈앞에 없는 사람》이라는 시집에 실린 <집>이라는 시중의 일부이다.


  “나는 이 시대의 청춘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다.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전 시대의 불행이 여전하거나 혹은 더 심화되거나 혹은 새로운 불행으로 거듭났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불행을 극복하는 일이 점점 각자 감당해야 할 몫이 돼버리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 시대의 청춘이 ‘응답하라’ 시리즈에 열광하는 현상이 나에겐 씁쓸하다. 그들의 행복한 기억이 자신의 과거가 아니라 타인의 과거, 아니 엄밀히 말하면 미디어가 제공하는 과거로부터 공급되는 것 같아서다.” (pp.50~51)


  그 시집을 읽고, “시인의 부드러운 언어들이 너무 좋지만, 예리한 시들이 좀더 많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지금 자신의 내부를 향하여 아무런 질문 없이도 떵떵거리며 무수한 답을 내보이는 자들로 매일매일 유린당하는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 그러니 부유한 답 대신 가난한 질문으로 살고 있는 우리들은 지금 시인의 말을 필요로 한다. 이러다가 우리는 질문(말)은 없고 답(말)만 난무하는 기형적인 세상에서 ‘눈앞에 없는 사람’이 될 지도 모르니 말이다.”라고 덧붙인 적이 있다. 2013년에 2011년에 출간된 시집을 읽고 적은 내용이다. 그리고 2019년에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를 읽는 일은 나의 오래전 요구에 대한 반응을 읽는 일과 같아서 반갑다. 


  “나도 쿨해지고 싶긴 한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꾸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과 씨름하면서 나의 좌뇌는 사회학으로 나아갔고 우뇌는 시로 나아갔다(오오, 양쪽 다 불쌍한 나의 뇌여).” (p.92)


  그가 시인이면서 동시에 사회학을 전공한 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그는 시인으로 시집을 꾸준히 발표하고 있으며 학교에서는 문학과 사회학이 연계된 무엇인가를 가르쳐왔다고 여겨진다. 그 전과정을 통해 그는 우리 사회가 당도한 어떤 지점에서, 당면한 여러 문제들을 거론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시를 쓰고 활자로 발언하는 것을 근간으로 하는 그의 여러 활동을 이제 알게 되었다. 


  『권위적이고 위계적인 사회에서 “나를 당신보다 높이지 말아요. 우리 서로 동등한 관계를 맺어요.”라는 제안은 오히려 불편함과 어색함을 가져온다. 그런 사회에서 암묵적 초기 설정은 평등의 반대이기 때문이다. 평등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평등한 관계는 권위적이고 위계적인 초기 설정을 시간과 공을 들여 변경할 때에만 이루어진다...』 (p.109)


  나긋나긋한 시인의 언어는 자신으로부터 발현하여 자신의 시에게로 흘러 들어갔고, 여정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한 흐름 더 나아가고 있다. 시인의 이런 면모를 알게 되어서 다행이다. 그것이 다행으로 그치지 않기 위해 독자 된 자로서의 또 다른 한 걸음도 있겠다 싶다. 평범하게 일상을 영위하는 자가 놓치지 말아야 할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또 글을 다루는 이들을 흠모하고 그들의 글에 취하기를 즐기는 자로서의 또 다른 한 걸음을 생각해본다.


  “나는 시라는 말 만들기 놀이를 통해 주어진 삶 말고 또다른 삶을 제작해왔다. 시 때문에 나는 두 개의 삶을 살게 됐다. 첫번째 삶은 정체가 뚜렷하지만 나를 구속하는 삶, 두번째 삶은 정체를 알 수 없지만 나를 자유롭게 하는 삶. 어쩌면 시 때문에 나는 첫번째 삶을 더 싫어하게 됐는지도 모른다.” (p.169)


  후기에서 작가는 자신에게 세 가지의 수수께끼가 있다고 말하였다. 그 각각은 ‘영혼이라는 수수께끼, 예술이라는 수수께끼, 공동체라는 수수께끼’이고 (책은 이 수수께끼에 따라 세 개의 챕터로 나뉘어 있다), 그 수수께끼를 스스로 풀어가는 과정은 작가가 글을 쓰는 과정과 고스란히 겹친다. 작가는 모르고 있을 수도 있지만 이 과정은 어쩌면 우리에게210000 없는 서러움을 찾아가는 노정과도 겹친다. 작가는 그 과정에서 우리가 상실한 것과 우리가 상실할지도 모를 것을 자꾸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우리 세대의 사람들, 우리 시대의 시 쓰는 이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상실의 상실’일 수 있겠다. 사실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많은 상실을 겪으며 살고 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빠른 세태 변화 속에서, 사건들의 범람 속에서 숱한 사물과 사람을 상실하며 사는 이들이 바로 우리다. 그런데도 상실감은 우리의 공통 감각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상실을 상실했다... 우리에게는 서러움이 없다. 모든 것이 눈앞에서 사라졌는데 고개 한번 돌리면 모든 것이 눈앞에 버젓이 있다. 미디어를 접하면서 슬픔과 아픔을 느끼다가도 바로 다음을 클릭하면 그런 감정은 사라진다.” (pp.178~179)



심보선 /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 그날 그 자리에 있을 사람에게 / 문학동네 / 327쪽 / 2019 (2019)

매거진의 이전글 안희연 《당신은 나를 열어 바닥까지 휘젓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