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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08. 2024

구달 《아무튼, 양말》

양말에 대한 무감을 무안하게 만드는 성실하고도 유머러스한 기록...

*2018년 12월 25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2018년의 크리스마스이다. 어느 옛날에 성 니콜라우스는 돈이 없이 결혼을 하지 못하고 있는 세 자매가 살고 있는 집의 지붕에 올라가 금 주머니를 굴뚝으로 떨어뜨렸다. 그리고 이 금 주머니는 우연히도 벽난로에 걸어 두었던 양말에 들어가게 되었다. 크리스마스와 양말은 이렇게 연결되었다. 세 자매는 아마도 그 금으로 나란히 결혼을 할 수 있었을 터이고, 나는 크리스마스에 드러누워 뒹굴거리며 《아무튼, 양말》 같은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양말을 좋아한다. 양말로 책 한 권을 쓸 정도로 좋아한다. 사실 이 책도 출판사에서 먼저 제안한 게 아니라 내가 꼭 쓰고 싶어서 출판사에 간곡히 제안했다... 출판계약서에 서명하던 날에는 자축하는 의미로 소중히 보관해온 그리데카나(GREDECANA)의 카키색 시스루 패치워크 양말을 꺼내 신었다. 이 양말은 굉장하다. 글로 묘사하기 어려울 만큼 굉장하다. 발목이 살짝 비치는 시스루, 매끈한 나일론, 보드보들한 타월까지 서로 전혀 다른 질감과 부피감을 가진 여러 천 조각을 이어 붙여 하나의 양말을 구현해냈다. 일본의 눈부신 양말 직조 기술이 집약된 이 제품을 구입한 건 5개월 전인데, 혹여 시스루가 뜯어질까 겁이 나서 그동안은 신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날도 먼저 손톱을 바짝 깎고 양말을 조심조심 집어 한 발 한 발 차례로 끼웠다. 예쁜 양말을 신고 계약서에 서명을 하니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물론 서명이야 발가락이 아닌 손가락으로 했지만.” (pp.9~10)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이 많다. 사실 양말을 88켤레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별의별 사람 축에 들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양말로 책을 한 권 써내는 것은 역시나 쉽지 않아 보인다. 책에는 이십만 원에 가까운 아주 비싼 양말이나 개성 만점의 브랜드 양말이나 독특한 캐릭터 양말 등에 대한 세세한 반응이 가득하다. 게다가 작가는 88켤레에서 멈추지 않고 지금도 양말을 늘려가는 중으로 짐작된다. 


  "양말 서랍도 깔끔히 정리했겠다, 양말 정리 3원칙도 (양말을 구기지 않는다, 양말을 사각지대에 두지 않는다, 양말 패턴과 색깔이 잘 보이도록 한다) 확립했겠다, 이참에 나도 유튜브를 시작해볼까 싶은 욕심이 생겼다. 양말 정리법을 알려주는 영상이나 양말 코디 영상이 2만 뷰씩 찍는 걸 보니 마음이 동했다. 양말 콘텐츠, 어쩌면 블루오션일지 모른다. 하지만 곧바로 난관에 부딪혔다. 아이디를 ‘범인은나다’로 하고 싶었는데 이미 동명의 유튜버가 활동하고 있었다. 시작이 반이라고들 하는데, 21세기에는 뭘 하든 항상 아이디 만들기에서부터 출발해야하니 시작을 시작하기가 너무 어렵다.“ (p.29)


  하지만 세상은 진짜로 넓고 사람은 정말 많아서, 작가는 어느 양말 브랜드의 이벤트에 그 양발 브랜드의 양말 25켤레로 자랑스레 인증 샷을 찍어 보내는 것으로 이벤트에 참가하였음에도 20위권에도 들지 못했다. 그 이벤트에서 일등을 차지한 사람은 그 브랜드의 양말 169켤레를 인증했다고 한다. 이벤트 발표를 보고 작가가 품었을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작가는 그 꼭지의 제목을 ‘지네 콘테스트’라고 적어 놓았다.


  “내게 양말은 이런 의미다. 예쁜 양말을 골라 신는 것만으로 평범한 일상이 단숨에 특별해질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내 양말 서랍장에는 빨주노초파남보 펄 레이스 벨벳 시스루 꽃 별 구름 땡땡이 가로줄무늬 세로줄무늬 지그재그까지 다양한 색상과 독특한 소재, 아름다운 패턴으로 평범한 하루를 특별하게 물들여줄 양말이 88켤레나 있다.” (p.34)


  이 구체적이고도 성실하고도 취향 확실한 작가의 양말에 대한 (어쩌면 삶을 향한 나름의) 애정사를 읽다보니 양말에 대한 나의 무감이 살짝 미안해졌다. 나의 양말은 같은 브랜드의 스포츠 양말 일곱 켤레로 한정된 지 오래이다. 일곱 켤레 양말의 색도 흰색, 검정색, 회색이 전부이다. 서랍에는 양복을 입을 때 신을 양말 한 켤레, 오래전 딱 한 번 신은 등산용 양말 한 켤레를 비롯해 몇 개의 양말이 더 있지만 그것들은 몇 년에 한 번 세상 구경을 하면 다행이다.


  “‘네이버가 놓친 대작’이라고 평가받으며 다음에서 인기리에 연재되었던 웹툰 <양말도깨비>에는 양말이 주식인 양말도깨비가 나온다. 도롱뇽을 닮은 아기 백구처럼 생긴 엄청 귀여운 생물인데, 몸을 투명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 투명한 몸으로 서랍에 숨어들어 몰래 양말을 훔쳐 먹으니 여간해서는 잡기가 어렵다. 입이 짧은지 한 켤레를 다 먹어치우지는 않고 꼭 한 짝만 먹는다. 그래서 양말도깨비가 사는 집에서는 늘 짝 안 맞는 양말 때문에 골치를 썩는다.” (p.117)


  물론 그 작은 숫자의 양말도 세탁기에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짝이 맞지 않기 일쑤이다. 함께 세탁한 셔츠 주머니에 들어가 있었다거나 스키니 진의 한쪽 다리에 끼어 있었다거나 해서 어느 순간 홀연히 모습을 드러내면 다행이지만 아예 사라지는 경우도 심심치 않았다. 양말도깨비가 등장하는 꼭지를 읽고 나자 왠지 안심이 되었다. 그러니까 세상은 넓고 양말도깨비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구달 / 아무튼, 양말 / 제철소 / 159쪽 / 201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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