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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08. 2024

조동범 《보통의 식탁》

생선 등에 낸 칼자국처럼 단락 구분된 마흔 개의 식탁...

  아무튼 시리즈의 ‘비건’ 편을 읽고 나서 저녁으로 레트로트 식품으로 만들어진 훈제 닭고기를 먹었다. 내가 좋아하는 아이템이었지만 아무래도 예전 같지는 않았다. 확신에 찬 채식주의자의 어조에 괜스레 입을 삐죽이며 읽었는데도 그렇게 되었다. 점심으로는 누룽지를 끓여 먹었는데, 원래 아내는 마약 샌드위치를 해주겠다고 했으나 배송에 문제가 생겨 재료들 중 일부가 제때 배달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평생을 칼라 디소토 같은 작은 섬에서 살다가 고요히 맞이하게 되는 죽음을 떠올려본다. 그리고 영화 도입부에 나오는 소박한 식사 장면을 떠올린다. 어둡고 고요한 마리오의 집. 언제까지고 지속될 것만 같은 고요. 그리고 고요를 배경으로 묵묵히 빵과 수프를 먹던 식사 시간. 문득 그들이 식사하는 장면에서 아무것도 되지 않는 삶의 행복을 발견한다. 그 무엇도 되지 않는다는 것은 어쩌면 가장 힘든 일이다. 오래도록 마리오의 빵과 수프를 그리고 그것을 먹던 순간의 어둠과 고요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토록 투박한 삶에 깃든 평범한 아름다움을 떠올린다.” (p.36~37)


  먹는 일에서 커다란 즐거움을 챙기지 못하는 타입이다. 장기 복용해야 하는 스테로이드제의 부작용으로 식욕이 충만해지기 전까지는 육십 킬로그램을 넘겨 본 적이 없었다. 식사를 만드는 일에서도 재미를 느껴보지 못했다. 결혼 초에 요리에 도전한 적도 있었으나 가성비가 좋지 못했다. 점심 먹고 시작한 부대찌개는 저녁이 다 되어서야 완성되었고, 맛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바람이 불어온다. 테이블보가 가볍게 일렁이며 오늘 저녁을 마무리하려 한다. 당신의 등 뒤로 저물녘의 태양이 이제 사라지려 한다. 당신은 문득 뒤를 돌아 출렁이는 바다를 오래도록 바라본다.” (p.61)


  책에는 식탁 위의 시간, 어떤 식사의 형태, 음식의 내력과 그 음식을 내기 위한 도구와 행위 등을 망라한 보통의 것들이 실려 있다. 시간을 내어 작가가 들여다보고 품었을 생각들이 생선 등에 낸 칼자국처럼 단락 구분되어 정렬되어 있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하고 마흔 개의 글로 채워져 있는데, 각각의 글은 하나의 식탁이 되고 식탁들마다 직관적인 제목이 붙어 있다.


  “칼은 도마에 박혀 단호한 직선이 되어버린 생선의 내력을 바라본다. 그것은 두려움인가, 아니면 따뜻한 한 끼 식사인가. 그것은 상처인가, 아닌가. 혹은 죽음인가, 삶인가.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칼은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열린 창문으로 여전히 바람은 불어오고, 햇살은 저물녘의 소멸을 향해 천천히 자신의 영역을 이동시킨다. 칼이 빛난다. 마치 죽음처럼 고요하게 그러나 삶의 내력을 어루만지는 상처처럼 절박하게 빛을 발한다. 먼 바다의 음역을 어루만지는 남극의 혹등고래처럼.” (pp.114~115)


  나쁘지 않은 컨셉이지만 그 식탁을 들여다보는 작가의 글을 들여다보는 풍미가 만족스럽지는 못하다. 샐러드로 치자면 드레싱의 특색이 부족하고, 스테이크라고 한다면 식감이 부드럽지 않다. 식탁을 하나의 메뉴라고 한다면 사십 개나 되는 메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책의 시그니처 메뉴라고 할 만한 것을 발견할 수 없다. 각각의 메뉴가 다른 것은 알겠는데, 어딘가 조금씩 닮아 있기도 해서 모두 읽고 나서 심심함을 느끼게 된다.  


  “반죽의 뜨거움을 지나 무수히 많은 빵의 형체로 분화하는 것처럼 모든 것은 다양한 결과를 낳는다. 하나의 출발이 언제나 하나의 결과로 귀결되는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실패라는 결과가 놓여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실패한 삶일지라도 삶을 견뎌온 시간마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뜨거움을 견디지 못한 빵이 버려진다 해도 그동안 견뎌야 했던 발효와 뜨거움의 순간마저 의미 없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p.143)


  내가 미식의 스타일이 아닌 탓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고독한 미식가>의 고로를 바라보는 일은 좋아한다. 그가 속으로 내뱉는 감탄과 흠뻑 드러나는 음미의 표정에는 나도 모르게 빠져들고는 한다. <고독한 미식가>에는 그러니까 보통을 보통이 아니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보통의 식탁》에는 바로 그 무언가가 빠져 있다. 보통을 보통으로 끝내고 말았는데, 우리의 ‘보통의 식탁’이 원래 그런 것 아니겠나, 하면 또 할 말은 없겠으나...



조동범 / 보통의 식탁 / 알마 / 189쪽 / 201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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