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주에부는바람 Aug 08. 2024

박연준 《밤은 길고, 괴롭습니다》

활자화된 한 권의 책으로 프리다 칼로의 영혼에 리본을 두르는...

  “그림과 시는 비와 눈처럼 닮았다. // 안개와 허기처럼, 그리움과 기차처럼 닮았다. // 밤과 다락처럼, 비밀과 그물처럼 닮았다. // 달과 고양이처럼, / 유령과 강물처럼, / 빨강과 파랑처럼 닮았다. // 그림과 시는 벽에 붙여놓을 수 있고, / 낱장으로 찢어 들고 다닐 수 있다. // 둘 다 사냥감을 종이 위에 ‘산 채로’ 데려와야 한다.” (p.11)


  김현 시인의 《걱정 말고 다녀와》라는 산문집이 있었다. 그 책에서 시인인 영화 감독 켄 로치를 끌어온다. 콜라보라고도 할 수 없고, 헌사라고도 할 수 없는 묘한 기록들로 가득한 책이었다. 알마 출판사의 ‘활자에 잠긴 시’ 시리즈 중 하나인 《밤은 길고, 괴롭습니다》은 비슷한 방식으로 박연준 시인에 의해 프리다 칼로가 소환된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나는 본격적으로 그녀의 그림 몇 편을 시로 번역하는 일에 도전했다.’라고 말하며 이를 ‘그림 번역’이라고 이름 붙인다. 


  “... 사랑에 빠진 자는 자신을 이루고 있는 것이 전과 달라진 자다. 당신이 눈앞에 보이면 언제라도 ‘변질될 수 있는 자세’를 취하러 세포 하나하나가 준비하고 있는 자, 존재의 근육이 유연해진 사람이다. 사랑이 침입했을 때 즉시, 온몸에 당신이 전이되어 ‘타자로 감염된 존재’가 되는 사람, 그래서 사랑에 빠진 자는 중심을 못 잡고 흔들리기 쉽다.” (pp.28~29)


  한 쪽 손으로는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번역하면서 동시에 다른 손의 끄트머리는 프리다 칼로의 생애에 갖다 대는 것, 어쩌면 이 책에서 취하는 작가의 스탠스이다. 그리고 프리다 칼로의 그림이 보여주는 자기파괴적이고 고통스러우며 동시에 서슴없이 열정적이고 초라하지 않은 가혹함이 프리다 칼로 본인의 생애의 면면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작가의 이러한 자세는 글을 밀고 나가는 데 있어 적합해 보인다.


  “실연은 사랑의 죽음이다. 저마다 알맞은 방식을 찾아 장례를 치러야 한다. 사랑에 실패한 자가 슬퍼한다고 해서 지나치게 염려할 필요는 없다. 그는 지금 상喪 중에 있다. 태어나고, 살며, 이력을 쌓고, 죽는다는 점에서 하나의 사랑은 한 생애生涯를 갖는다. 사랑에 실패한 자는 반드시 상을 치러야 한다. 죽은 후, 다시 태어나야 한다. 때로 제대로 죽지 못한 사랑은 육체를 지불해 (완전히) 죽기도 한다. 사람보다 사랑이 모질 때, 일어나는 일이다.” (p.70)


  그렇게 책에는 모질고 뾰족한 사투가 가득하다. 그러한 사투가 사랑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어서 더욱 전투적이다. 디에고 리베라를 향하였던 프리다 칼로의 사랑의 방식에 대한 호오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판단하지 않는 대신, 사랑 전반에 대한 그리고 사랑으로 점철된 삶이라는 것에 대한 아포리즘을 채워 넣고 있다.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닮아서 몇몇 (그러니까 어떤 젊은 친구와의 편지 왕래와 같은) 장면을 빼면 대체로 곤혹스럽게 냉정하다. 


  “늙음은 고통과 단짝이에요. 슬픔이 제 할 일을 조금 열렬히 하면 고통이 되죠. 고통이 스스로 개선하려는 의지 없이 방탕해지면 늙음이 되고요.” (p.116)


  우리들 모두는 어쨌든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하고 살아간다. 그리고 우리는 자주 그러한 사실을 잊는다. 우리의 고통은 때때로 이러한 망각으로부터 비롯된다. 우리는 혼동하지만 어떤 이는 그러니까 프리다 칼로와 같은 이는 이를 혼동하지 않는다. 작가의 아포리즘은 우리들 사랑과 삶에 공히 해당하는 공통의 방정식을 확인하는 데 유용한 것이 아니라 나의 사랑과 삶에 특화된 공식을 끄집어내는 데 더욱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프리다 칼로의 그림들은 불치병을 앓는 자가 울리는 기도이자 제사다. 절박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지금도 움직인다. 꿈틀대고 말하고 비명을 지르고 죽고 살아난다. 기도하는 자의 힘이다. 미치지 않으면 미칠 수 없다不狂不及는 옛말처럼, 무엇에 미친 사람의 손끝에서 나오는 작품은 언제나 도를 넘는다. 도를 넘어 아름답고, 도를 넘어 끔찍하다. 도를 넘어 흥미롭고, 도를 넘어 경이롭다. // 도를 넘는 일. 사랑이 종종 즐겨 하는 일이다.” (p.203)


  박연준은 이 책의 마지막에 이르러 ‘프리다 칼로의 그림들은 불치병을 앓는 자가 울리는 기도이자 제사다.’라고 말하고 있다. 프랑스의 시인 앙드레 브레통은 ‘프리다 칼로의 예술은 폭탄 주위에 둘러진 리본이다.’라고 말했다. 프리다 칼로의 병은 깊었고 그의 육체는 피폐하였으나 우리는 여태 프리다 칼로를 기억하고 시인은 활자화된 한 권의 책으로 프리다 칼로의 영혼에 리본을 두르고 있다. 



박연준 / 밤은 길고, 괴롭습니다 / 알마 / 209쪽 / 2018 (2018)

매거진의 이전글 서효인 박혜진 《읽을 것들은 이토록 쌓여가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