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자키 준이치로 《미친 사랑》

길들이려다 길들여지는, 길들여지다 결국 길들이고 마는...

by 우주에부는바람


소설을 읽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극 <리타 길들이기>를 떠올렸다. 소설 속 열다섯 살의 여급 나오미가 연극 속의 젊은 부인 리타를 어째서 소환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그저 나오미가 조지의 손에 이끌려 조지가 마련한 집에 들어가고 영어를 배우고 피아노를 배우기 위해 전철을 타고 다니는 장면에서 리타가 떠올랐다. 나오미가 리타처럼 성장하게되는 것인가, 짐작했는지 모른다.


“내가 자신은 촌스러운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취미로는 하이칼라를 좋아하고, 만사에 서양식을 흉내 낸 것은 독자 여러분도 이미 알고 계실 것입니다. 만일 나에게 충분한 돈이 있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면 나는 어쩌면 서양에 가서 생활했을 것이고 서양 여자를 아내로 삼았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내 처지가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인 중에서도 어쨌든 서양인 냄새가 풍기는 나오미를 아내로 삼은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아무리 나에게 돈이 있었다 해도 사내다운 모습에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어쨌든 키가 5자 2치밖에 안 되고 피부는 검고 치열도 고르지 않은 내가 그 당당한 체격의 서양 여자를 아내로 삼는 것은 지나치게 분수를 모르는 짓이다, 역시 일본 사람에게는 같은 일본 사람이 좋고, 나오미 같은 여자가 가장 내 격에 맞는다 - 그렇게 생각해서 나는 꽤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p.99)


소설은 젊은 회사원인 조지가 카페에서 만난 나오미를 자신의 여인으로 만들려고 작정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그것을 실행에 옮긴다. 나오미는 조지가 상상하는 이상형에 (아직은 미흡하지만 결국에는) 다다르게 되리라고 짐작되는 여인이다. 조지에게는 고향에서 나름 경제적으로 부족하지 않은 부모가 있었고, 꼬박꼬박 괜찮은 월급을 받고 있는 회사도 있었다. 집을 얻고 나오미와 함께 사는 일은 그렇게 실현된다.


“나오미는 품에서 휴지를 꺼내 스스로 닦지 않고 그것을 내 손에 쥐여주었지만, 눈동자는 가만히 나를 향한 채 이제 곧 닦이기 전에 더한층 눈물을 속눈썹 끝까지 찰랑찰랑 넘치게 하고 있었습니다. 아아, 얼마나 촉촉하고 아름다운 눈인가. 이 아름다운 눈물방울을 그대로 결정체로 만들어 고이 보관해둘 수는 없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나는 맨 먼저 그녀의 뺨을 닦아주고, 그 동글동글하게 맺힌 눈물방울을 건드리지 않도록 눈 주위를 닦아주자, 피부가 늘어졌다 당겨졌다 할 때마다 눈물방울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하면서 볼록렌즈처럼 되었다가 오목렌즈처럼 되었다가 마지막에는 형태가 무너져 모처럼 닦아놓은 볼 위로 다시 빛나는 실을 끌면서 주르르 흘러내리는 것입니다...” (p.115)


소설의 초반부에서 연극 <리타 길들이기>를 떠올렸다면, 영화가 중반을 넘어서부터는 영화 <은밀한 유혹>을 떠올렸다. 조지를 우디 해리슨으로 나오미를 데미 무어로 대체했다. 물론 나오미는 자신의 의지로 젊은 대학생들과 어울리지만, 조지는 우디 해리슨과 다르지 않은 질투에 사로잡힌다. 나오미는 댄스를 배우러 다니면서, 그리고 그 이전과 이후에 만나게 된 남성들과 관계를 맺고 조지는 결국 이를 알아차리게 된다.


“... 대체로 목욕을 마친 여자의 모습은 목욕탕에서 방금 나왔을 때보다 15분이나 20분쯤 지난 뒤가 정말 아름답습니다. 욕탕 안에 들어앉아 있으면 아무리 피부가 고운 여자라도 한때는 살갗이 너무 익어서 손가락 끝 같은 데가 빨갛게 붓는 법이지만, 몸이 적당한 온도로 식으면 비로소 밀랍이 굳은 것처럼 투명해집니다. 나오미는 돌아오는 동안 바깥바람을 쐬었기 때문에 바로 지금 목욕을 갓 마친 여자가 가장 아룸다운 순간에 있는 것입니다. 그 연약하고 얇은 살갗은 아직 수증기를 머금고 있으면서도 하얗게 맑고 깨끗하며, 옷깃에 가려진 가슴 언저리에는 수채화 물감 같은 보랏빛 그림자가 있습니다. 얼굴을 마치 젤라틴 막을 씌운 것처럼 반들반들 광택을 띠고 오직 눈썹만이 촉촉하게 젖어 있는데, 그 위에는 맑게 갠 겨울 하늘이 창문을 통해 푸르스름하게 비쳐 있었습니다.” (p.313)


이 부분부터 소설은 또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나오미를 경제적으로 지휘하고 있던 조지는 나오미를 자신의 집에서 내치지만 결국 그로 인해 궁지로 몰리는 것은 나오미가 아니라 조지이다. 처음에는 오랜만에 그러나 이후에는 며칠에 한 번씩 조지의 집을 찾아오는 나오미에게 조지는 굴복한다. 조지는 나오미를 자신의 의지에 따라 원하는 이상향의 여인으로 만들어가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조지는 나오미가 원하는 실권이 없는 남편으로 길들여지고 말았다.


“내 손에 쥐어진 면도날은 은빛 벌레가 기어가듯 완만한 피부를 더듬어 내려가 그녀의 목덜미에서 어깨 쪽으로 옮겨갔습니다. 풍채 좋은 그녀의 등이 새하얀 우유처럼 넓고 볼룩하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도대체 그녀는, 제 얼굴은 늘 보고 있겠지만 등이 이렇게 아름답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그녀 자신은 아마 모를 거야. 그것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바로 나야. 나는 일찍이 이 등을 날마다 목욕통에 넣고 씻어주었지. 그때도 지금처럼 이렇게 비누거품을 일으키면서······. 이것은 내 사랑의 유적이야. 내 손이, 내 손가락이 이렇듯 기막히게 아름다운 하얀 눈 위에서 희희낙락하며 놀고, 이곳을 마음대로 즐겁게 밟아본 적이 있었지. 지금 어딘가에 그 흔적이 남이 있을지도 몰라······. (pp.317~318)


《미친 사랑》은 주로 ‘치인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는 다니지키 준이치로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열다섯 살에서 스물세 살까지의 나오미와 스물여덟 살에서 서른여섯 살까지의 조지를 소설 속에서 만날 수 있다. 작가의 탐미는 몇몇 문장이나 분위기를 통해서 느껴지기도 하지만 소설을 읽는동안 두근거리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하여 새벽까지 내처 독서를 이어갈 수밖에 없는 독자의 마음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다니자키 준이치로 / 김석희 역 / 미친 사랑 (痴人の愛) / 시공사 / 347쪽 / 2013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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