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모토 테루 《오천 번의 생사》

죽음의 기척으로 가득한 생의 한 시기를 지나...

by 우주에부는바람

「토마토 이야기」

“전철 막차 좌석에 앉아 취한 머리로 유리창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면 피바다 속에서 나뒹굴던 썩은 토마토 다섯 개가 맹렬한 기세로 눈앞을 달려 지나간다. 그러면 반드시 가고시마현 가와무라 세쓰 님이라는 글자가 몸속 깊은 데서 망령처럼 떠오르는 것이다. 그럴 때 나는 마치 그것이 자신의 병이나 되는 듯이 그 사내에게 토마토는 대체 뭐였을까, 편지에는 그 사내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이 쓰여 있었을까, 하고 생각에 잠긴다 그 편지는 분명 이타미 고야의 커다란 교차로 아스팔트 밑에 지금도 묻혀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토마토를 봐도 그때의 일이 떠올라 슬퍼지지는 않는다. 핏덩이 같았던 썩은 토마토 다섯 개의 영상이 나를 섬뜩하게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 이후 토마토를 단 한 조각도 먹은 적이 없다.” (pp.41~42) 과거의 어느 한 때 내가 경험한 토마토 이야기는 무척 선명하다. 엄청나게 커다른 차들이 지나다니는 후미진 공사 현장, 그 현장에서도 후미진 곳에 위치한 노동자들의 임시 숙소, 그곳에서 죽어 가던 어떤 사내, 그 사내에게 토마토를 거네는 나, 그 사내가 쏟아낸 피와 그 피바다에서 뒹굴던 토마토, 그리고 내가 흘려버린 편지, 그 편지 위로 쏟아져 내린 아스팔트, 그리고 아래의 편지, 나의 지나가버린 어떤 젊은 시간 같은 것들 모두가 선명하다.


「눈썹 그리는 먹」

“... 나는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낙엽이 쌓인 부드러운 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왔다. 마른 잎을 밟는 내 발소리가 깊은 나무숲 안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앞쪽에 소곤거리는 뭔가의 목소리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천천히 걸어도 채 5분이 걸리지 않는데도 그때의 내게는 굉장히 길고 무서운 밤길이었다.” (pp.73~74) 엄마 그리고 고모와 함께 떠난 여행에서 나는 엄마의 병에 대해 알게 된다. 자기 전이면 먹으로 눈썹을 그리는 엄마는 암이다. 나의 요양을 위해 떠난 여행, 흔치 않은 곳에서의 평안은 사라졌다. 나는 사라져갈 무언가를 손에 쥐고 있고, 엄마는 내내 눈썹을 그리고 있다.


「힘」

‘어린 나의 뒷모습은 나라는 인간 속의 골목길로 돌아갔을 것이다.’라는 마지막 문장이 좋다. 아버지의 실패로 인한 이사와 그로 인한 전학, 그리고 내게 주어진 길찾기라는 과제 끝에 나는 모르던 나의 아버지가 서 있었다.


「오천 번의 생사」

“오천 번 정도가 아니야. 오만 번, 오십만 번, 아니 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나는 죽어왔어. 맹렬하게 살고 싶어진 순간 그걸 확실히 알 수 있지. 그 대신 죽고 싶을 때는 자신이 태어나기 전의 일은 전혀 생각나지 않아. 수십만 번이나 다시 태어난 것을 알 수 없게 되는 거지.” (p.111) 친구가 가지고 싶어 했던 라이터를 가지고 떠난 길은 그러나 실패로 끝난다. 대신 나는 집으로 돌아오던 기나긴 길에서 한 녀석의 자전거를 얻어 타게 된다. 추운 겨울의 어떤 날, 생사가 달려 있을지도 모를 그 새벽의 길 위에서 나는 ‘오천 번의 생사’를 겪은 것인지도 모른다.


「알코올 형제」

친구였던 두 사내는 이제 한 회사의 두 개의 노조의 주동자가 되었다. 두 사람은 술집에 앉아 술을 마시며 조금씩 서로의 속내를 털어 놓는다. “친구 사이로 돌아가지 않겠나?” 한 사내가 말하고, “나는 계속 친구였네. 말을 하지 않은 건 자네였어.” 다른 사내는 대답한다. 하지만 그렇게 헤어진 후 벌어진 일들은 소설의 앞 부분을 확실하게 전복시킨다.


「복수」

어린 시절의 세 친구가 나이 들어 다시 만났다. 그들을 괴롭히던 선생에 의해 두 친구는 퇴학을 당했고, 나는 남아서 그 시간들을 견뎌냈다. 그들은 이제 그에게 복수를 하기로 한다. 내가 여자가 되어야 했던 그 시절을 향한 복수다.


「양동이 밑판」

아마도 공황장애에 시달리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사내는 자신이 다니던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이제 규모가 작은 철물점의 영업 사원 격인 역할을 하고 있다. 비가 내리는 날 진흙투성이의 공사 현장에서 나는 어쩌면 내가 성공시킨 첫 번째 영업일 ‘양동이 밑판’을 설치한다.


「보라색 두건」

재일교포 북송이 한창이던 시기, 북송하던 이들이 떠난 자리에서 발견된 요시코의 시체, 그 시체를 발견한 어린 우리들, 그리고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던 친구의 북송, 그리고 그 친구가 알려 준 요시코의 보라색 두건....


「쿤밍 · 원통사 거리」

말을 더듬던 어린 시절의 친구, 하지만 그 친구는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말 더듬는 버릇을 고쳤다. 그와 나는 오토바이를 탔고,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흘러 나는 그 어리시절의 골목을 닮은 골목을 가지고 있는 중국에 있고, 그 친구는 죽어가고 있다.



미야모토 테루 / 송태욱 역 / 오천 번의 생사 (五千回の生死) / 바다출판사 / 255쪽 / 2018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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