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프라이즈가 아니라 조금씩 조금씩 형체를 만들어가는 격렬함...
*2018년 10월 12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지지난 밤 책을 읽느라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중간중간 깨어난 아내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내게 어서 자는 것이 좋겠다고 몇 차례 말했다. 그러다 아내가 일어날 시간이 되었고, 희뿌연 사위로부터 빛이 새어 들어왔다. 출근 준비를 마친 아내와 함께 고양이 용이에게 약을 먹였다. 《에이미와 이저벨》의 마지막 몇 페이지를 마저 읽었다. 아내는 한숨도 자지 않은 남편을 걱정하며 출근했고, 나는 《에이미와 이저벨》의 마지막 몇 페이지를 마저 읽은 다음, 나의 출근 시간 전까지 두 시간 정도를 다시 잤다.
“... 비서라는 사실 때문에 이저벨 굿로가 다른 여자들과 다른 지위를 얻긴 했지만 어쨌거나 그녀는 달랐다. 예컨대 옷차림도 흠잡을 데 없어서 이렇게 더운데도 팬티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언뜻 예뻐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예쁘다고 하기는 그렇고 그냥 평범한 수준이었다. 숱이 적은 진갈색 머리도 둥글게 말아올리거나 틀어올려서 누가 보더라도 평범했다. 이런 머리 모양 때문에 고리타분한 여선생 같은 인상을 줄 뿐 아니라 실제보다 더 나이들어 보였고, 짙은 색의 작은 눈동자는 늘 놀란 눈빛이었다.” (p.14)
소설의 제목인 ‘에이미와 이저벨’ 은 소설에 등장하는 모녀의 이름이다. 에이미는 이제 열여섯 살로 이저벨의 딸이고, 이저벨은 공장에서 사장의 비서로 일하며 에이미를 키우고 있다. 이저벨은 다른 도시에서 이곳 셜리폴스로 와서 자리를 잡았다. 이저벨은 갓난 아기인 에이미를 키워주던 엄마가 죽자 대학을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셜리폴스로 온 첫해에는 결혼 반지를 끼고 남편이 있는 척 하였지만 그것도 그만 두었다. 벌써 오래 전의 일이다.
『침묵이 흘렀다.
“알겠니?”
“네.” 에이미가 조심스럽게. 자칫 엄마에 대한 혐오감을 들키지는 않을 만큼 냉정하게, 하지만 예의 없다는 꾸지람을 계속 들을 만큼 냉정하지는 않게 대답했다. 이저벨은 돌아서서 현관 옷장으로 가 코트를 걸었고, 곧 에이미의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p.122)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이들은 대부분 그리 호감형의 인물들이 아니다. 이저벨은 자신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사장에게 호감을 품고 있다. 그가 매력적이어서라기 보다는 그저 외롭기 때문일 확률이 높다. 자신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는 마음을 터놓고 어울리지 않는다. 딸에게는 엄격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자신의 인생을 이곳 후미진 곳으로 이끈 데에 딸이라는 원인이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그리하여 에이미와 이저벨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서로 대화를 나누면 그들의 말은 나무 블록처럼 공기 속에서 이리저리 떠밀리는 것 같았다. 어쩌다 서로 눈이 마주치면 - 차에서 내리거나 휴게실에서 나오면서 - 되도록 빨리 시선을 피했다. 그러지 않아도 작은 집인데, 가까이 있으면 위험하기라도 한 것처럼 집에서도 서로서로 조심조심 지나갔다. 그러자 오히려 상대방을 더 의식하게 되어, 그들은 서로를 지켜본다는 기묘한 친밀감으로 결합되었다...” (p.282)
소설이 시작되면서 ‘검은 선’이라고 부르던 어떤 것의 정체는 소설의 중반이 넘어가고 나서야 정체를 드러낸다. 엄마와 딸이 서로를 향하여 보이던 어떤 적의와 혐오가 어디에서 기인했는지를 알지 못한 채로 소설을 절반쯤 읽어야 한다. 그렇다고 서프라이즈를 외치면서 사건이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아주 조금씩 조금씩 형체를 잡아가는 사건의 실체를 그림자처럼 내내 옆에 둔 채로 독서를 진행할 수밖에 없다.
“... 그날 아침 에이미의 옆에 누워 블라인드의 가장자리로 환한 빛이 새어들어오는 모습을 보면서 이저벨은 뭔가 시작되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항복하고 단념하고 내려놓는 느낌이었다. 정확히 뭐였을까? ...” (p.508)
다음 날 아내는 내게, 내가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이 그저 잠이 오지 않아서였는지 아니면 소설이 재미있어서였는지 물었다. 나는 양쪽 모두였다고 말했지만 소설의 어두운 접착력이 아니었다면 그저 불면만으로 힘들었을 거라는 마음이 들었다. 날이 완전히 밝아진 다음 읽기는 끝이 났고, 모녀가 공통으로 간직하게 된 비슷한 뉘앙스의 사건들은 그 과거와 현재는, 이어진 내 짧은 잠에서조차 격렬했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Elizabeth Strout / 정연희 역 / 에이미와 이저벨 (Amy and Isabelle) / 문학동네 / 546쪽 / 2016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