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내 이름은 루시 바턴》

중구난방의 궤적을 끝까지 추적한 어떤 '냉혹함'이 만들어낸...

by 우주에부는바람


소설에 나온 두 개의 문장이 이상하게 뇌리에 남는다. 그 문장에 포함된 내용 때문이 아니라 그 문장이 표출하는 어떤 형식 때문이다. 하나는 “당시는 휴대전화가 등장하기 전인 1980년대 중반이라, 침대 옆에 놓인 베이지색 전화기가 울렸다...” 라는 문장이다. 소설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문장이고, 1980년대 중반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넌지시 알리는 문장일 수도 있겠는데, 촌스럽지만 그래서 오히려 유니크하게 느껴지는 벽지를 발견한 것처럼 한참 들여다보게 되었다.


또 하나는 “... 한번은 누구누구 - 유명한 여자 배우의 이름을 댔다 - 를 센트럴파크에서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여자가 걸어가는 걸 보면서, 저렇게 산다는 건 어떤 걸까? 그런 생각을 했거든요.” 라는 문장이다. 어쩐지 이 문장도 앞의 문장처럼 거추장스러운 설명을 그만큼이나 거추장스럽게 하고 있다고 느껴져 거부감이 들면서도, 동시에 자꾸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묘한 패턴을 가지고 있다.


“... 우리가 다른 사람 혹은 다른 집단보다 스스로를 더 우월하게 느끼기 위해 어떤 방법을 찾아내는지가 내게는 흥미롭다. 그런 일은 어디에서나, 언제나 일어난다. 그것을 뭐라고 부르건, 나는 그것이, 내리누를 다른 누군가를 찾아야 하는 이런 필요성이 우리 인간을 구성하는 가장 저속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p.111)


소설은 루시 바턴이라는 여인이 스스로를 기록하는 형식을 띠고 있다. 주로 구 주 동안 그녀가 입원하였던 병원에서, 그리고 그 병원에 잠시 왔던 자신의 엄마와 보낸 시간에서 비롯된 기록들인데, 과거와 현재가 무작위로 뒤섞이고 결국에는 그 시간 이후까지도 스스럼없이 끼어든다. 그러니까 소설은 한 여인의 서사로 가득하지만, 그 서사는 하나의 시간으로 진행되지 않고, 여러 개의 시간으로 동시에 진행된다.


『... 나는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오빠와 언니가 어땠는지, 두 사람의 얼굴에 떠올랐던 당혹감이 자꾸 생각났다. 우리 다섯 식구가 정말로 건강하지 않은 가족으로 살아왔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그러다 어느 순간 나는 우리의 뿌리가 서로의 가슴을 얼마나 끈질기게 칭칭 감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남편이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가족들을 좋아하지도 않았잖아.” 그뒤로 나는 더더욱 두려워졌다.』 (pp.194~195)


그녀는 시골 마을에서도 멀리 떨어진 후미진 곳에서, 그리고 극심한 가난 속에서, 자식들에게 철저히 무관심한 부모 그리고 오빠와 언니와 함께 살았다. 가족들 중 그곳을 떠난 것은 루시 바턴이 유일하고, 떠난 후에 그녀는 병원에 입원한 그 때까지 귀향해본 적이 없다. 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으로 입원한 그녀를 느닷없이 엄마가 방문하고, 엄마는 한동안 그녀의 옆에서 머물다가 돌아간다.


“... 나는 진정, 냉혹함은 나 자신을 붙잡고 놓지 않는 것에서,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이게 나야, 나는 내가 견딜 수 없는 곳 - 일리노이 주 앰개시 - 에는 가지 않을 거고, 내가 원하지 않는 결혼생활은 하지 않을 거고, 나 자신을 움켜잡고 인생을 헤치며 앞으로, 눈먼 박쥐처럼 그렇게 계속 나아갈 거야!, 라고. 이것이 그 냉혹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pp.204~205)


소설 속 루시 바턴의 인생사를 따라가는 시간의 궤적이 일목요연하지 않은 것처럼, 그녀의 심경의 궤적 또한 중구난방이다. 하지만 그 중구난방의 궤적을 관통하는 것은 그녀가 자신의 모든 시간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으려 한다는 것, 그러니까 ‘냉혹함’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 중구난방의 궤적을 끝까지 추적한 ‘냉혹함’이 루시 바턴을 작가로 만들었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Elizabeth Strout / 정연희 역 / 내 이름은 루시 바턴 (My Name is Lucy Barton) / 문학동네 / 230쪽 / 2017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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