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니 에르펜베크 《모든 저녁이 저물 때》

즐비한 주검들 사이로 비뚤비뚤 걷는 삶의 대담한 존재 방식...

by 우주에부는바람


소설은 독특한 구성을 가지고 있다. 소설은 다섯 개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것에는 제1권에서 제5권까지의 이름이 붙어있다. 그러니까 그 각각의 챕터의 이야기는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로서 작용한다. 그러나 각 권의 사이에 ‘막간극’이라는 이야기가 따라 붙는다. 죽음을 통하여 분리되어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이야기들은 이 막간극이라는 이야기를 접착제 삼아 다시 하나의 이야기로 통합된다.


“... 딸이 이제 조만간 깨닫게 될 사실을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한 사람이 죽은 하루가 저문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저녁이 저무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p.24)


각권의 이야기는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막간극은 또 하나의 삶의 이야기로 작동한다. 하나의 이야기는 ‘한 사람이 죽은 하루’가 저무는 것으로 끝이 나지만, 그것으로 모두 끝나는 것은 아니다. 저문 하루를 변형시키는 막간극을 보고 나면, 이제 우리는 새롭게 시작되는 또 다른 삶의 이야기를 건네받게 된다. 그렇게 살아남은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의 시간은 그리고 역사는 계속된다.


“... 그날 새벽 3시 20분까지는 살아 있었던, 그녀의 가장 친했던 친구의 자리에 눕는다. 한 사람이 죽은 하루가 저문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저녁이 저무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제 그녀는 슬픔에 잠겨, 뭐라고? 어제까지만 해도 따뜻하게 살아 있었던 친구의 것을 물려받아, 이제 친구의 몸으로 변하여, 애인의 몸속에서, 친구와 대화를 나눈다...” (p.109)


제1권에서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죽은 아기는 제2권에서 소녀로 성장한다. 제2권에서 우연한 만남을 통한 자살로 생을 마감한 소녀는 제3권에서 공산주의자로 아슬아슬하게 살아가는 여인으로 다시 살아간다. 제3권에서 수용소의 죽음으로 끝이 났던 여인은 제4권에서는 60세 노인이 되어 다시 계단에서 실족사하게 되지만, 노인은 제5권에서는 치매 노인을 위한 요양원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드디어 모든 저녁이 저물게 된다.


“오스트리아 공무원의 딸로 브로디에서 태어난 그녀는 빈에서 자랐고 1920년 공산당에 입당했고, 1933년 프라하를 거쳐 모스크바로 이주했습니다. 모스크바에서 처음에는 잡지 『인터내셔널 문학』지에서 소련 시의 번역자로 활동하면서 인민에게 문학을 소개하는 데 이바지했고, 비열하게도 히틀러 독일이 소련을 침략하자, 지하 방송 라디오 모스크바에서 반파시스트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습니다.” (p.227)


소설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제국으로 통합되어 있던 무렵에 시작된, 폴란드인에게 맞아 죽은 유대인 아버지를 둔 유복자에게서 딸로 태어난 여인을 어미로 둔 딸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 딸은 거듭되는 죽음을 통과하면서 동시에 세계대전과 스탈린 시대와 냉전 시대를 함께 통과한다. 그리고 이 모든 시절이 끝이 나고 동서독의 통일이 된 다음, 그제야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녀의 몸은 하나의 도시다. 그녀의 심장은 그늘진 커다란 광장, 손가락은 보행자, 머리카락은 가로등의 불빛이며 무릎은 두 개의 블록이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다닐 길을 만들어주려 했다. 그녀는 자신의 측벽과 탑을 열어젖히려 했다. 거리가 그처럼 큰 고통이 될 줄 그녀는 알지 못했다. 자신에게 그처럼 많은 거리가 있으리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몸을 가지고 몸에서 나오기를 원한다. 하지만 열쇠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 나는 머리가 잃을까봐 두려워. 누군가 내 머리의 열쇠를 빼앗아갈까봐 두려워.” (p.273)


작가는 소설을 통해 무척 대담한 방식으로 대략 하나의 세기를 정리한다. 이것은 꽤나 고통스러운 방식이기도 해서 소설을 읽는 일이 그리 수월하지 않다. 소설에서 한 인간은 충분히 죽고 또 충분히 살아난 다음에야 겨우 죽는다. 아기의 죽음에서 시작된 소설은 노인의 죽음으로 끝이 난다. 그렇게 소설에는 주검들이 즐비하고, 삶은 그 주검들 사이를 비뚤비뚤 걷는 것으로 애써 존재한다.



예니 에르펜베크 Jenny Erpenbeck / 배수아 역 / 모든 저녁이 저물 때 (Aller Tage Abend) / 한길사 / 313쪽 / 2018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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