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그는 빗방울이 전선에 맺혀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때까지 살아왔던 방식을 한꺼번에 바꾸었다. 그러니 정말 흥미있는 이야기는 그 뒤에 비로소 시작되지만, 일단 이 이야기는 그가 전선의 빗방울을 보기 전까지이다.
그의 사층방 창문 왼편에 세워진 전신주의 꼭대기로부터 그 전선은 뻗어내려온다. 소로 맞은 편 오른쪽으로는 주유소가 서 있다. ‘불, 불, 불조심’이라는 점선활자들이 물고기 입처럼 적요하게 달싹거리는 주유소의 구식 전광판 뒤로 전선은 가파른 빗금을 그어내리고 있다. 덕분에 그가 창을 통하여 보는 풍경은 언제나 절반으로 비스듬하게 잘려 있다.“ (p.12) 소설의 도입부이다. 나는 이 도입부가 아주 좋다. 많은 것을 알려주는 것 같지만 많은 것을 숨기고 있기도 하고, 반대로 많은 것을 숨기고 있는 것 같지만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기도 한 도입부다. 독자는 소설 속의 주인공인 그와 함께 이 도입부로 인하여 도입부와 그 이후의 전개 안에 갇히게 된다. 저도 모르게 끌려 들어가고 만다.
「아기 부처」
“매우 중요한 진실 하나가 계시처럼, 마치 누군가 내 귀에 속삭인 것처럼 떠올랐다.
나는 처음부터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믿기지 않는 일이었지만 나는 그의 흉터 때문에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했고, 이제 그 흉터 때문에 그를 혐오하고 있었다. 그의 흉터가 다만 한겹 얇은 살갗일 뿐이라는 것을 나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안다는 것이 내 마음의 얇은 한겹까지 벗겨내주지는 못했다.“ (p.92) 신산한 삶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과 스스로 제 내면을 드러내 보이는 신산한 삶을 포착하는 일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그저 어둑한 곳에 존재하는 것들의 정체는 알려진 것처럼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생강향 같은 나무냄새가 촉촉이 번져 있었다. 갈참나무들은 아직 헐벗은 나뭇가지들을 허공으로 뻗어올린 채 침묵에 잠겼지만, 저 검은 나무껍질 속에도 봄 대지의 즙이 흘러올라와 있을 것이다. 일주일쯤 더 지나면 잎눈이 피어나기 시작할 것이다... 겨울에는 견뎠고 봄에는 기쁘다.“ (p.125)
「해질녘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
“아이는 어느 날 아빠가 많이 울어서 엄마가 그를 좋아했다는 말을 떠올린다. 아이의 상처난 무릎을 빨아주며 엄마의 얼굴에 어리던 헤아릴 수 없는 근심을 떠올린다.
엄마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그것이었을까, 아이는 생각한다. 어린애처럼 들먹이는 아빠의 어깨를 올려다보면서 괜찮아요,라고 말해주고 싶던, 그 찢어지는 것 같던 마음이었을까 하고 생각한다. 이 마음을 계속해서 갖고 있는 것이 괴로와서 엄마는 이 마음을 버렸을까, 그래서 우리 둘을 떠나버린 것일까 하고 생각한다...“ (p.174) 엄마가 떠나고 남은 아이는 아비의 손에 이끌려 떠돈다. 어린 딸과 아비가 묶고 있는 곳은 마치 세계의 끝 같다. 허공을 밟고 다니는 것 같은 아비가 있으면 덩달아 휘청거리게 되는 어린 딸이 생긴다.
「붉은 꽃 속에서」
“맵싸한 감각이 그의 목구멍 안쪽에 느껴졌다. 왜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수 없겠지만, 그 스님이 눈물을 흘린 까닭을 어쩐지 알 것만 같았다. 하지만 대답할 수 없다면 안다고 할 수 있는 걸까...” (p.191) 어린 동생의 죽음과 스님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그녀... 그 사이로 조금씩 흘러가는 여정을 조금씩 나눠 가진 가족들이 있을 것이고, ‘붉은 꽃 속에서 제가 밝혀져 있었던 것’을 알고 있기는 했을까 싶은 ‘불빛’도 있을 것이고...
「내 여자의 열매」
“이제 아내의 몸에는 한때 두 발 동물이었던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포도알같이 맺혀 있던 눈동자는 다갈색 줄기 속에 차츰 파묻혀갔다. 아내는 이제 볼 수 없었다. 줄기의 끝도 까딱할 수 없었다. 그러나 베란다에 들어서면 형언할 수 없는 아련한 느낌이 아내의 몸에서 나에게로 미미한 전류처럼 흘러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때 아내의 손과 머리카락이었던 잎사귀들이 남김없이 떨어져내리고, 입이 오그라붙었던 자리가 벌어지면서 한움큼의 열매가 쏟아져나왔을 때 그 실낱 같은 느낌은 끊어졌다.” (p.241) 피멍에서 시작된 아내의 변화, 그렇게 동물을 벗어버리고 식물을 입어버리게 되는 모든 과정은 타의라고 할 수 있을까 자의라고 할 수 있을까...
「아홉 개의 이야기」
“서른살이 되던 겨울, 어느 저녁 그 여자는 세면대에서 발을 씻다 말고 갑자기 손을 멈춘다. 상처는 진작 아물어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 가시덩굴이 날카롭게 그녀의 발을 찔러올 때 입술을 악물었던 그날의 햇빛, 눈이 아리도록 바다와 논배미와 비포장도로의 모래먼지 위로 차올랐던 햇빛이 그녀의 차가운 발등 깊숙이 박힌다.” (p.247) 시간과 시간 사이를 무력하게 만드는, 몸에 각인되는 어떤 아홉 개의 이야기...
「흰 꽃」
“그것이 어떤 여행이었든, 장기간의 여행이 끝난 뒤 식당에 둘러앉은 일행은 대체로 말이 없습니다. 여행을 시작하던 때의 크고 작은 흥분과 두려움들은 더이상 남아 있지 않지요. 그저 각자의 피로를 견디며 말없이 밥을 먹는 것입니다. 뜨거운 밥을 후후 불며 깔깔한 혓바닥으로 반찬을 삼킵니다. 아스피린 가루를 풀어놓은 것 같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혓바늘 돋은 입속에 굴러다니는 밥알의 생경한 감촉을 느끼며 함께 견디는 것입니다. 마치 산다는 일이 오랫동안 그래왔다는 듯이...” (pp.280~281) 바다 위에서 바라보는 아무것도 아닌 이들, 그리고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그들의 죽음마다 머리에 얹혀졌던 흰 나비 같은 리본 핀...
「철길을 흐르는 강」
“한기가 들어와 팔짱을 끼려 하자 외투 아래의 가슴께부터 그녀의 몸뚱이가 비어 있었다. 놀라 목덜미를 감싸쥐자 그곳도 비어 있었다. 얼굴을 만지기 위해 손을 들어올렸다. 손이 있어야 할 자리가 투명하게 비쳐 보였다. 비어 있는 외툿자락 속에서 무엇인가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작고 꼬물꼬물한 것들이 안간힘을 다하여 기어나왔다. 모가지가 부러진 박새들이었다...” (pp.311~312) 어린 시절 내가 주머니 안으로 거둬들였던 죽은 박새, 생의 어느 한 시기에 날아올랐던 어떤 기억은 그대로 박제되어, 생의 다른 어느 순간마다 불쑥 튀어나오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