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삶의 어두운 구석이 아니라 일상화된 어둠 그 자체에 시선을 보내는.
「무정」
“둘은 뒹굴면서 싸우더군요. 진이 일어나서 둘을 떼어 놓으려고 해도 쉽지가 않았죠. 저는 그냥 옆에서 엉켜 있는 그들을 바라봤죠. 코미디였어요. 정말 웃겨서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계속 웃다 보니 소변이 마렵더라고요. 너무 급했죠. 저는 바닥에 엄마를 깔고 엄마 배 위에 올라 탄 아버지의 모습까지 보고 화장실로 향했어요.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어요. 저는 길게, 아주 길게 소변을 봤어요.” (p.36) 이 가족의 냉랭한 환타지, 그 중심에 내가 있다, 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 반대로 이 가족의 냉랭한 환타지, 그 주변부에 내가 있다, 라고 해야 할까. 나를 낳은 엄마, 호주에 살고 있는 엄마와 헤어져 이쪽에 있는 아빠, 아빠가 보낸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엄마의 동생인 이모, 그리고 아빠와 함께 살고 있는 이진까지... 나의 무정의 근원이면서 나의 무정의 미래일 수도 있는 캐릭터들의 좌충우돌이 한 가득이다.
「림보」
“... 나는 아내와 있으면 마음이 가라앉았고 안정이 되었다. 하지만 지하실 여자를 들인 후부터는 아내에게도 나에게도 뭔가 자꾸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살아 있는 아내는 사건 현장의 죽은 사람보다 파악하기 힘들었다. 불안했다.” (p.60) 현장에서 시체를 감식하는 일을 하는 (뭔가 분명치 않기는 하지만) 나의 집 지하를 모녀에게 세를 놓았다. 어린 아이는 간혹 나의 서재에 들어와 있고는 한다. 마당의 빨랫줄에는 엄마의 속옷이 널려 있고는 한다. 나는 현장에 나가 죽은 이들을 살핀다. 아내와 나는 각자의 방에서 자고, 정해진 날짜에 섹스를 할 때만 한 침대를 이용한다. 약속되지 않은 날에 아내를 내 침대에서 느껴 나는 당황한다.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 혹은 삶에 파고 들어 있는 죽음 혹은 죽음의 둘레에 쳐진 흰 색 선을 따라 존재하는 삶과도 같은, 림보...
「내 이름은 나나」
“... 아무 위로도 되지 않았지만 나는 계속해서 문자를 보냈다. 나처럼 다른 오토바이에 업혀 한없이 달리다 멈춰서는 낯설고 휑한 도로를 걷고 있을 다른 나나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p.92) 소설 속 나나, 그 나나들이 어느 시기 소설 속에 속속 등장하였다. 그리고 어느 날 다들 사라졌다. 세상 속에는 아직 그 나나들이 여전할 것 같은데...
「아오리를 먹는 오후」
“... 삼촌은 새 사과를 꺼내고는 입을 길게 벌렸어요. 혀가 윗입술에 붙었다 떨어지는 게 보였어요. 삼촌의 이가 들어간 부분부터 커다랗게 사과 살이 뜯겨져 나왔어요. 우적대며 사과를 씹어 먹는 삼촌의 입에서 사과즙이 튀었어요. 삼촌은 후루룩거리며 즙을 마셨어요. 사과 하나가 삼촌의 목구멍으로 들어가는 건 너무도 순식간이었어요...” (p.119) 삼촌이 사과를 먹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그 강한 인상은 소설 전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죽음에 이른 이후, 다리 아래 소녀가 바라보는 하늘로부터 시작하여 신산하기만 하였을 소녀의 삶으로 옮겨간 소설은 사건이 일어난 그 시간을 거쳐 다시금 사람들에 의해 발견되는 소녀의 시선으로 돌아온다.
「문틈」
“지옥에 사는 악마. 디오네아 무시풀라와 깍지벌레처럼 우리는 같은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누구나, 누구에게, 언제나 천적이 될 수 있는 세계에” (p.161) 히키고모리, 방에만 머물고 있는 내게만 파리지옥이라는 호칭이 부여되어야만 하는 것인가. 때로는 그 방 문틈 너머 바깥의 사람들도, 아니 언제든 그들도 식충 식물이 될 수도 있는 그런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절대온도」
“... 우리는 이름도, 집을 나온 각자의 이유도 있을 테지만 서로에 대해 묻지 않기로 합의했다. 많이 알고 있을 때 더 많은 의심을 하게 된다고 나나가 어른처럼 이야기했다. 모두 나나를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p.169) 그러니까 <절대온도>는 <내 이름은 나나>에서 언급하는 또 다른 나나들에 대한 이야기일 수 있다. 이들은 가족의 해체로 인해 떨어져 나온 아이들이고, 이제 다시 팸이라는 이름의 유사 가족으로 뭉치고자 하지만 그것이 여의할리 없다.
「오! 해피」
“나는 엄마의 가슴을 토닥인다. 행복해? 조용히 묻는 말을 들었는지 엄마는 응, 하고 대답한다. 아니 꿈결 어느 한가운데서 뭘 보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도 잠에 빠져든다.” (p.233) 행복을 향하고자 한다는 일념으로, 우리들의 욕망이 한 곳으로 한 곳으로만 모여들 때, 우리들은 종종 그 강탈당한 시선으로 인하여 또 다른 비극의 지점에서 눈을 뜨게 되고는 한다. 그리고 어리둥절한 채 그저 잠시 잠에 빠져드는 것으로 숨을 고를 수 있을 뿐이다.
「맨홀」
“불이 꺼졌다. 이제 완전한 어둠이다. 정말 아스라한 불빛 하나 없는 어둠이 찾아오고 말았다. 생각해 보니 맨홀은 구멍이 아니었다. 나는 빛을 잃은 순간 맨홀이 되고 만 것이었다. (p.259) <아오리를 먹는 오후>에서 죽은 소녀가 제 죽음을 인지하지 못한 채 남은 것들을 떠올린다면 이제 <맨홀>에서는 한 발 더 나아가 죽은 엄마는 딸의 품에서 아기가 되어 있다. 대부분의 소설에서 희망 따위 그렇게 환해질 것이라는 기대 따위 개에게나 줘 버려, 라는 태도로 일관하는 작가는 그예 마지막 소설에서까지 어둠을 일상화시키고 있다.
김봄 / 아오리를 먹는 오후 / 민음사 / 283쪽 / 2016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