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후밀 흐라발 《영국왕을 모셨지》

허름한 온천 호텔 작은 방 바깥으로 날아오르는 헌 속옷의 이미지가 훨훨.

by 우주에부는바람

‘이제부터 하는 이야기 좀 잘 들어보세요!’

소설은 모두 다섯 개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는데, 모든 챕터는 위와 같은 문구로 시작된다. 소설의 화자인 나는 디테, 라는 이름의 인물이다. 프라하 호텔에서 견습 웨이터로 일을 시작한 나는 키가 작고 볼품 없지만 호텔 사장이 되고 백만장자도 되리라는 야심을 품고 있다. 어린 시절에는 외할머니와 살았는데, 외할머니는 창문 너머 온천 여관의 창문을 통해 버려지는 속옷을 갈고리로 챙기고, 그것을 빨아서 다시 팔아 나를 키웠다.

‘괜찮았나요? 오늘은 이 정도로 할게요.’

소설의 네 개의 챕터는 위와 같은 문장으로 끝난다. 그러니까 소설은 기나긴 생을 거친 내가 독자인 우리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거기에는 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을 거쳐 장년에 이르는 시간들이 프라하 호텔에서 티호타 호텔과 파리 호텔 그리고 데친 근처의 호텔과 채석장 호텔이라는 장소들이 차례대로 등장한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챕터에 이르면 아래와 같은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이야기가 흡족하셨는지요? 이제 이것으로 정말 끝입니다.’

내가 만나는 등장인물들도 여럿이다. 프라하 호텔의 지배인이었던 말레크 그리고 라이스키 창녀촌의 여인들과 사업차 호텔에 들르던 인물들, 티호타 호텔의 지배인 즈데네크와 괴력의 소유자인 포터, 파리 호텔의 지배인 스크르지바네크와 호텔에 들렀던 아비시니아(이티오피아의 옛 이름)의 황제가 그들이다. 만약 전쟁이 없었다면 나는 그렇게 여러 호텔을 거치며 지배인이 되고, 운이 좋았다면 사장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내기를 해서 항상 잃었기 때문에 받은 팁을 모두 그렇게 없앴지만 행복했다. “지배인님, 어떻게 그 모든 걸 아세요?” 그러면 그는 이십 코루나 지폐 두 장을 지갑에 넣으며 말했다. “난 영국 왕을 모셨지!”』 (p.142)

하지만 내가 이렇게 여러 호텔을 거치는 동안 체코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당시는 세계대전이 한창이었다. 나는 파리 호텔에 있는 동안 리자라는 독일 출신의 여성을 만나고 사귀게 되는데, 그로 인해 호텔에서 잘리게 되지만 독일의 침공 이후에는 리자 덕분에 여러 곳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나는 나의 뿌리를 바꿔가면서까지 피의 순혈성을 증명하고 결국 리자와 결혼한다.

“... 언제나 군복을 입은 젊은 장교와 젊은 여자가 말없이 서로를 꼭 껴안고 있었다. 아비시니아 황제를 모셨던 나지만 왜 그렇게들 애틋한지, 그런 것은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알아맞힐 수가 없었다.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는데, 이곳에 있는 두 사람이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이게 바로 새로운 인간이었다. 승리에 도취되어 소리를 지르며 윽박지르는 거만한 인간이 아니었다. 정반대였다. 겸손하고 사려 깊으며, 겁먹은 동물처럼 예쁜 눈을 가진 인간이었다...” (p.221)

전쟁의 시기, 그러나 리자는 새로운 인간을 창조한다는 나치의 이념에 충실한 인물이었고, 두 사람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지만 그 아이는 건물 바닥에 못을 박는 것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다른 아이들보다 느렸다. 두 사람은 아이와 함께 살지 않았고 둘이 함께 살지도 않았다. 나는 체코에 있으면서 체코인들로부터 배척을 당했지만 독일인들 사이에서도 없는 사람 취급을 받았다. 전쟁은 끝났고 나는 나의 호텔, 채석장 호텔을 갖게 되었고, 백만장자에 가까워졌지만 결국 모든 것은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버렸다.

“... 종종 나는 도로를 정비하는 일을 내 인생의 길을 정비하는 것과 비교해보았다. 인생을 돌아보니 마치 다른 사람에게 일어났던 일인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의 인생 전체가 누군가 다른 사람이 쓴 한 편의 소설이며 내 인생이란 책의 열쇠는 나 자신만이 갖고 있는 것이었다. 내 인생의 유일한 증인은 바로 자신이었다. 비록 내 인생이라는 길의 처음과 끝에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을지라도 곡괭이와 삽 대신 기억의 도움을 빌려 아주 먼 과거까지 돌아갈 수 있게 정비해놓고, 기억하고 싶은 곳으로 돌아가 회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p.328)

작은 욕망들을 조금씩 만족시키면서 성장하는 삶을 살 수도 있었던 나, 디테는 그렇게 인생의 뒤안길에 접어들었다. 이제 과거를 회고하면서 그것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해주면서 남은 생을 살아내고 있다. 한 인간의 사적인 역사는 이렇게 언제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거대한 역사와 꼼꼼하게 맞물리고 만다. 온천의 작은 방에서 훨훨 날아오르는 헌 속옷 나부랭이, 그것을 갈고리로 건져 올리던 나의 외할머니의 이미지, 어쩌면 그 이미지만이 오롯이 내 것으로 선명할 뿐이다.


보후밀 흐라발 Bohumil Hrabal / 김경옥 역 / 영국왕을 모셨지 (Obsluhoval jsem anglického krále) / 문학동네 / 2009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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