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베르펠 《옅푸른색 잉크로 쓴 여자 글씨》

가엽고 나약하지만 비열하고 추레하게, 역사의 한켠에서 기회주의적으로...

by 우주에부는바람

《옅푸른색 잉크로 쓴 여자 글씨》는 나치가 한창 위세를 떨치던 시기, 오스트리아의 교육부 차관인 레오니다스의 하루, 단 하루를 그려내고 있는 소설이다. 하지만 이 하루에 많은 것이 들어 있다. 레오니다스의 평생이 그 하루에 들어 있으며,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평생이 들어 있다. 또한 그 하루에는 나치가 유럽인들에게 어떤 영향력을 갖고 있었는지, 또한 유대인들의 처지가 어떤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보여주는 단서들이 포함되어 있다.


“...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자기야말로 의심할 여지 없는 신들의 총아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만약 사람들이 그에게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지 묻는다면 아마도 다음과 같은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는 우주를 하나의 거창한 행사로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이 행사의 유일무이한 의미와 목적은 자기와 같은 신들의 총아를 저 밑바닥에서 높은 곳으로 살살 끌어올려, 그들 손에 권력과 명예, 영광 그리고 호사를 쥐여주는 데 있다고 믿었다...” (p.15)


주인공인 레오니다스인 가난한 라틴어 선생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학도 가정교사 생활을 하며 겨우 유지하였다. 하지만 어느 날 기숙사 옆방에 살던 ‘머리 좋은 이스라엘인’이 자살고 함께 자신에게 남긴 연미복을 갖게 되었고, 그 연미복을 입고 참가한 연회를 통해 상류 사회로 들어설 기회를 잡게 되었고, 결국 아멜리 파라디니라는 빈에서 가장 부유한 집안의 딸과 결혼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쉰 살이 된 지금 그는 여전히 부유한 아내 덕분에 경제적으로 아무 부족함이 없고, 교육부 차관이라는 지위에 다다랐다.


“... 섬세하고도 자명한 사교술을 그새 완벽하게 배웠고 또 지난 몇십 년 동안 무의식적으로 그 사교술을 발휘하며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로마인이 ‘해방된 노예’라고 부른 바로 그런 존재였다. 노예 신분으로 살다가 해방된 사람은 파라디니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과는 달리 진실에 대한 자연스러운 용기를 소유하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에게는 모든 수치를 무릎쓰고라도 진실을 고백하려는 무모한 고상함이 없었다...” (p.168)


하지만 소설 속의 바로 그날, 그는 탁자 위에 놓은 ‘옅푸른색 잉크로 쓴 여자 글씨’를 확인하는 순간 그것이 바로 베라의 글씨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베라는 유대인이고, 그는 베라의 집에서 베라의 오빠를 가르친 적이 있으며, 그는 아멜리와 결혼한 이후 독일에 업무차 갔다가 그곳에서 베라를 만났다.) 그는 십팔 년 전 “잘 지내고 있어, 내 생명. 두 주만 참아. 그러면 내가 데리러 올게!” 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이후 베라를 버렸다. 그로부터 삼년 뒤 베라에게서 온 편지를 받았지만 그는 그것을 뜯지도 않은 채 버렸다. 그리고 그로부터 다시 십오 년이 흘러 다시 한 통의 편지가 날아든 것이다. 그러니까 소설은 이렇게 그의 하루를 완전히 뒤흔들어버린 한 통의 편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신비로운 동시성 안에서 진행되었다. 그녀의 옆얼굴은 그에게 하나의 계시와도 같았다. 보름서 박사의 딸, 하이델베르크에서 다시 만난 처녀, 바로 그녀가 지금 그 앞에 서 있다니! 기억에서 더 이상 지워지지 않고 말이다. 그리고 그녀의 흰머리와 단념의 뜻을 담고 있는 입매, 이마의 주름살 - 이 모든 것들이 그의 일시적인 황홀감을 달콤하고도 씁쓸하게 더해주었다.” (p.199)


이 하루에는 편지의 내용을 확인한 후에 베라가 자신에게 그저 하나의 부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레오디나스, 자신에게 장성한 아들이 생기게 되리라 여겨서 아내에게 이를 고백하기로 작정하는 레오디나스, 자신의 상관에게 유대인을 아내의 의심과 의심의 해제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고백을 포기하는 레오디나스, 베라를 만나 모든 사실을 듣고도 오히려 안도하는 레오디나스가 모두 들어 있다.


“... 자갈길 위에서 바퀴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하얀색 유모차들 안에서는 원인의 결과와 결과의 원인들이 잠을 자고 있었다. 원인과 결과들은 젖먹이처럼 볼록 튀어나온 이마에 입술을 앞으로 쑥 내밀고 주먹을 불끈 쥔 채 어린이 특유의 깊은 잠을 자고 있었다...” (p.222)


만약 그 기숙사의 자살한 이스라엘인 동기가 아니었다면 거머쥐지 못했을지도 모른 레오디나스의 현재는 이러한 하루가 지난 뒤에도 큰 변함이 없을 것이다. (베라에게서 엄청난 이야기를 들은 바로 그 저녁 레오디나스는 하루 동안의 그의 회한이 무색하게도 아내와 함께 오페라를 관람하는 중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나치에 동조하였던 가엽고 나약하지만 그만큼이나 비열하고 추레하였던 주변의 기회주의자들의 현재가 함께 하고 있다. 작가는 이렇게 한 인물의 사생활을 전지구를 뒤흔든 역사적 상황에 결합시키고 있다, 차분하게...



프란츠 베르펠 Franz Werfel / 윤선아 역 / 옅푸른색 잉크로 쓴 여자 글씨 (Pale Blue Ink in a Lady's Hand) / 강 / 231쪽 / 2016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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