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 영근 열매와 같지만 푹 익은 맛을 상상하기에 충분한...
《사냥꾼들》은 1957년에 출간된 (1997년 개정판이 나왔고, 소설은 이 개정판을 번역한 것이다.) 제임스 설터의 첫 번째 소설이다. 한국전쟁에 전투기 조종사로 참가하였던 제임스 설터는 한국전쟁이 끝나고 독일의 공군기지에 근무하는 동안 이 소설을 써서 제임스 설터라는 필명으로 (제임스 설터의 본명은 제임스 호로비치였다) 잡지에 연재하였으며, 이후 작가는 제임스 설터라는 이름을 계속해서 쓰게 된다.
“비행기 열두 대가 두 대씩 짝을 지어 활주로에 늘어섰다. 엔진 속도가 빨라졌다. 기체 꽁무니에서 하얀 연기가 하늘로 뿜어져 나왔다. 뒤이어 귀를 찢는 듯한 굉음이 마치 최후의 불바다처럼 대기를 가득 채우며 울려 퍼졌다. 잔인할 만큼 깊고 확신에 찬 소리였다. 영원할 것 같았다. 후미에 선 비행기들이 동체가 떨리도록 강한 바람을 내뿜었다. 물고기가 꼬리를 흔들며 조용히 조류를 거슬러 올라가듯 맨 앞의 두 대가 방향타를 좌우로 흔들며 서서히 활주로를 미끄러지더니 점차 속도를 높여 활주로 끝까지 질주한 뒤 마침내 하늘로 날아올랐다. 다른 비행기들이 곧 그 뒤를 따랐다.” (p.48)
소설의 주인공은 서른 한 살의 클리브 대위이다. 전투에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비행 실력 하나만큼은 알아주는 클리브는 이제 드디어 한국전쟁에 배치됨으로써 자신의 진가를 기회를 잡게 된다. 하지만 계속되는 출격에도 그는 전과를 올리지 못한다. 적기 다섯 대를 격추시키게 되면 얻게 되는 에이스, 라는 칭호는 공군 조종사라면 누구나 바라마지 않는 명예이다. 그는 편대장이 되었지만 전쟁은 얼마 남지 않았고 그는 겨우 한 대의 적기를 격추시켰을 뿐이다.
“인간이 실패를 겪으며 성숙하고, 승자도 실은 승리를 거둘 적마다 기력을 잃어서 원기를 되찾느라 더 큰 고생을 한다는 것은 어쩌면 사실일지 모른다... 그러나 클리브가 보기에 그것은 빈곤이 곧 강성해지는 길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았다. 결코 가난해서 강성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난은 영혼을 좀먹는 것이다... 가난을 이겨내는 사람이 드문 것처럼 패배 속에서 눈물 외에 다른 것을 발견하는 사람도 드물었다... 그는 자신이 왜 이런 상황에 처했는지, 승리와 패배만이 존재하는 견고한 틀 속에 어떻게 해서 자신이 갇히게 되었는지 의아했다. 뛰어남의 정의가 오직 하나인 이 황폐한 땅에서는 승리와 패배만이 존재할 뿐 그 어떤 타협도 없었다...” (p.101)
여기에 신참 펠이 등장하면서 클리브의 행로는 더욱 꼬이게 된다. 승리를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펠은 한 대, 두 대, 세 대 자신의 전과를 늘리기 시작한다. 편대장으로서 클리브는 펠의 동료애를 무너뜨리는 행위를 나무라지만 펠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클리브의 상관이나 동료들 또한 펠이 세운 공로에 집중할 뿐, 그 성공 뒤에 감추어진 펠의 야비한 면모에 대해서는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다.
“... 승리의 순간을 위해 이곳에 왔지만 어떤 의미에선 지금 그가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 이상을 원하고 있었다. 승리를 갈구하는 것에 초연하기를, 승리를 거머쥐어야 하는 필요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랐다. 하지만 자신이 그곳에 다다르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는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는 이미 전쟁의 포로였다. 미그기를 잡지 못하면 제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는 실패자가 되는 것이었다...” (p.219)
전쟁에는 언제나 아군과 적군이 있고, 어느 한 쪽의 승리와 다른 한 쪽의 패배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어느 한 쪽의 내부로 들어서면 그 내부에 또한 승리와 패배가 도사리고 있다. 승리한 편에 속해 있다고 해서 모두가 승리한 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전쟁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는 말은, 승리한 편에 패배한 자가 있을 수도 있고 패배한 편에 승리한 자가 있을 수도 있다는 말로 바꾸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비행대대는 삶의 요약판이다. 당신은 어려서 그곳에 처음 당도한다. 그때는 기회도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모든 것이 새롭다. 그러다 자기도 모르는 새에 고통스러운 배움의 나날과 환희의 날들이 지나가고 어느덧 성인기에 접어든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어느 날 문득 당신은 이미 늙어버린 자신을 발견한다...” (p.257)
《사냥꾼들》은 덜 영근 열매 같다. 소설의 전반부와 중반부까지는 지루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러나 이륙과 착륙 그리고 비행의 순간들에 대한 묘사들에서 그리고 일본에 머무는 동안 주인공이 누리는 것들에 대한 묘사들에서 작가의 그 오묘한 특성, 그러니까 건조하고 냉정하지만 읽다보면 축축해져버리는 황홀한 뉘앙스의 단초를 엿볼 수 있었다.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한다.
제임스 설터 James Salter / 오현아 역 / 사냥꾼들 (The Hunters) / 마음산책 / 316쪽 / 2016 (1956,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