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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Jul 30. 2024

폴 오스터 《4 3 2 1》

갑작스러운 운명의 결정으로 뻗어나가는 삶의 가지들...

  폴 오스터의 소설 《4 3 2 1》은 삼대에 걸친 러시아계 유대인, 퍼거슨 가문의 미국 정착기로 시작된다 원래 록펠러라는 라스트 네임을 조언받았으나 이민국 직원의 질문에 ‘이크 호브 파게센 Ikh hob Fargessen’ 잊어버렸습니다, 라고 대답하는 바람에 이사크 레지니코프였던는 이제 미국 땅에 이커보드 퍼거슨으로 새롭게 시작한다. 이어 이커보드 퍼거슨은 삼형제인 루와 아널드와 스탠리를 낳았고, 스탠리는 로즈와 결혼하여 아치 퍼거슨을 낳았다. 


  “...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었고, 일이 한 가지 방식으로 일어났다고 해서 다른 방식으로 일어날 수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모든 게 다를 수 있었다. 세상은 똑같은 세상이지만, 만일 나무에서 떨어지지 않았더라면 그에게는 다른 세상이 펼쳐졌을 것이다... ” (p.102, 1권)


  하지만 소설은 퍼거슨 가문의 미국 정착기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나아간다. 퍼거슨의 미국 도착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아치 퍼거슨이 태어난 이후 하나의 뿌리를 둔 서로 다른 이야기로 줄기를 뻗어나가기 시작한다. 어떤 이야기에서 아치 퍼거슨의 아버지 스탠리 퍼거슨은 죽고, 나머지 이야기에서는 죽지 않고 살아간다. 어떤 이야기에서 퍼거슨 부자는 불화하고, 또다른 이야기에서는 그렇지 않다.


  “... 아버지는 아무 말도 없었고, 이어진 며칠 동안도 계속 아무 말이 없자 퍼거슨은 아버지가 원고를 잊어버린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중요한 건, 아버지가 큰 문제가 아닌 그 문제를 얼마나 하찮게 여기고 있나 하는 것이었고, 퍼거슨은 아버지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 이상 그 이야기를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그건 점점 더 중요한 문제, 시간이 지날수록 아주아주 중요한 문제로 커져 갔다.” (pp.168~169, 2권)


  또한 《4 3 2 1》은 소용돌이치는 미국 현대사의 한복판인 60년대를 관통하면서 다양한 사건들을 훑고 지나간다. JFK와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의 사망, 말콤 엑스와 루터 킹 목사의 사망, 베트남 전쟁과 콜롬비아 대학의 시위를 비롯한 반전 시위, 그리고 흑인들의 시위를 다룬다. 아치 퍼거슨의 대학 입학 이후, 맺어지는 다양한 관계 그리고 퍼거슨 본인의 활동은 이 사건들과 무관하지 않다.  


  “... 낯선 것과 익숙한 것을 통합하는 일, 그게 퍼거슨이 하려는 일이었다. 가자 헌신적인 현실주의자처럼 세상을 가까이에서 관찰하면서, 동시에 다른 시각으로, 조금은 왜곡된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만들어 내는 일, 익숙한 것만 파고드는 책들은 필연적으로 이미 알고 있는 것들만 가르쳐 줬고, 낯선 것만 파고드는 책들은 알 필요가 없는 것들만 가르쳐 줬다. 퍼거슨이 무엇보다 원했던 건 감각적인 대상과 무기력한 사물만 있는, 그렇게 눈에 보이는 세상뿐 아니라, 보이는 것 뒤에 숨은 거대하고 신비한, 보이지 않는 힘까지도 담고 있는 이야기를 쓰는 일이었다...” (p.143, 3권)


  소설에는 스포츠, 영화, 문학과 관련된 내용들도 무수히 등장한다. (미국에서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라면 좀더 감응하며 소설을 읽었을 것이다.) 야구와 농구를 직접 겪는 퍼거슨을 통해 기념비가 될만한 스포츠 경기가 언급되기도 하고, 상실감에 사로잡힌 엄마와 함께 간 영화관에서 시작된 미국 영화 그리고 프랑스 영화 편람도 꽤 된다. 직접 소설을 쓰는 퍼거슨이 있으니 거론되는 문학 작품도 만만치 않음은 물론이다.


  “같지만 다른, 그러니까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네 명의 소년들, 같은 몸과 같은 유전적 자질을 지녔지만, 각각 다른 동네의 다른 집에서, 각각의 환경에서 살아가는 소년들. 이런 식으로 짜놓으면, 그 서로 다른 환경 때문에 책이 진행됨에 따라 소년들은 서로 멀어지기 시작하고, 유년기와 청소년기, 그리고 성인기의 초반에 이르기까지 각자 기거나, 걷거나, 숨 가쁘게 달리며 점점 더 다른 성격을 띠게 될 것이다. 한 명 한 명은 각자의 길을 가지만, 그 모든 각자는 여전히 같은 인물, 그 자신에 대한 상상으로 만들어 낸 세 개의 버전이고, 그다음엔 그 자신이 네 번째 자아로 투입되어 상당 부분 이야기되겠지만, 책의 구체적인 내용은 그도 아직 모르고, 자신이 무얼 하려는지는 책을 시작한 후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p.444, 4권)


  실토하자면 1권을 모두 읽을 때까지는 네 명의 퍼거슨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였다. 엄청난 선택의 순간이 아니라 그저 갑작스럽게 결정된 운명에 의한 삶의 방향이 지극히 자연스러웠던 탓인지도 모른다. 퍼거슨이 쓴 「솔 메이츠」라는 제목의 행크와 프랭크라는 양쪽 신발이 주인공인 소설이 감명 깊었고, 대부분의 퍼거슨 주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내는 에이미라는 인물도 흥미로웠다.



폴 오스터 Paul Auster / 김현우 역 / 4 3 2 1 / 열린책들 / 전4권 1권 335쪽, 2권 344쪽, 3권 423쪽, 4권 456쪽 / 2023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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