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린 사적 역사를 바르게 펴야 하는 우리들의 책무를 대신하는...
삶은 단선적이지 않다. 하나의 뿌리에서 여러 줄기가 나온다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다. 삶은 그저 하나의 뿌리에서 하나의 줄기로 뻗고 거기서 꽃도 피고 열매도 맺고 그러고 스러지는 것임은 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단선적이지 않다. 거기에는 우리가 끊임없이 경험하게 되는 일종의 왜곡 혹은 비틀림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단선적인데도 단선적이지 않다. 우리는 복수의 단선을 품은 채 인생을 산다.
“... 그는 행위를 근거로 정신 상태를 판단할 수 있다고 했다. 헨리 8세를 비롯한 기타 등등의 역사에서 그 사례를 찾을 수 있다고 했다. 반면에 개인의 삶에서는 그 반대가 진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즉, 현재의 정신 상태를 근거로 과거의 행위를 판단할 수 있다.” (P.80)
게다가 우리는 짧은 생을 살아내고 있는 동안 그리고 살아낸 후에 그것을 살아내던 순간과는 다른 의미로 복기하는 (행복한 능력인지 불행한 능력인지는 차지하고)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를 번복할 수 있다는 자유 의지를 가지지만 때때로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의 원죄이기도 하다. 소설 속 주인공인 나 앤서니가 평생에 걸쳐 끊임없이 자신의 행위를 자신의 경험을 자신의 추측을 회고하며 느끼는 고통이 거기에서 연유한다.
“...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 아니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 (p.101)
소설은 ‘책에 굶주려 있었고, 섹스에 굶주려 있었고, 성적표에 연연하는 아나키스트’였던 소년 혹은 소년들의 성장기로부터 시작한 한 개인의 일대이기이다. 그리고 그 일대기는 곧바로 하나의 사적인 역사이다. 앤서니라는 한 인물이 파악하고 있는 하나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며, 이 인물이 관계맺고 파악하였던 주변 인물들이 가지고 있던 또 다른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인성의 깊이와 세월의 흐름은 비례하는 걸까? 소설에선 물론 그렇다. 그렇지 않다면, 스토리라고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 인생에선 어떨지 가끔 궁금해질 때가 있다... 어쩌면 인성이란 다소 시간이 지나서, 즉 이십대에서 삼십대 사이에 정점에 이른다는 점만 빼면, 지성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그 시기가 지나면 우리는 그때까지 쌓은 소양에 여지없이 고착되고 만다...” (pp.179~180)
학창 시절로부터 시작된 앤서니와 에이드리언은 앤서니가 베로니카라는 미스터리한 인물을 사귀고, 그녀의 가족을 방문하고, 그녀와 헤어지고, 에이드리언과 그녀가 사귀고, 에이드리언이 자살하는 것으로 그 관계의 전반부를 마감한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하나의 이야기이겠지만 소설에서 이 전반부는 오히려 후반부, 그러니까 생의 후반부에 갖게 되는 나의 ‘질문’을 끄집어내는 도입부에 불과할 뿐이다.
“인간은 생의 종말을 향해 간다. 아니다, 생 자체가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 그 생에서 가능한 모든 변화의 닫힘을 향해. 우리는 기나긴 휴지기를 부여받게 된다. 질문을 던질 시간적 여유를...” (pp.254~255)
베로니카와의 연애 그리고 에이드리언의 죽음으로부터도 멀찌감치 떨어지게 된 시간이 되어서 그러나 소설은 다시 한 번 시작된다. 지금의 아내와의 결혼과 이혼, 딸인 수지가 태어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서 할아버지가 된 지금 앤서니는 다시금 죽은 에이드리언과 그리고 살아 있는 베로니카와 맞닥뜨리게 된다. 소설은 그렇게 새롭게 시작되고, 나 앤서니는 그시절의 나로 돌아가서 희미해진 기억을 더듬으며 스스로를 복기한다.
줄리언 반스 /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The Sense of An Ending) / 다산책방 / 267쪽 / 2012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