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문장에서 ‘그’는 아서 코난 도일이다. 맞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그 셜록 홈즈라는 캐릭터를 창조한 (코난 도일을 모를 수는 있지만 셜록 홈즈를 모를 수는 없다. 프랑켄슈타인은 알지만 작가 메리 셸리는 모를 수도 있고...) 코난 도일 경이다. 그리고 이 소설은 바로 그 코난 도일의 일대기를 내용으로 품고 있다. 그런데 원제가 이상하다. 아서 와 조지 Arthur & George 라니? 아서 와 홈즈, 혹은 아서 와 왓슨 정도는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책을 읽기 전에 셜록 홈즈의 팬을 자처하는, 은 아니고 셜록 홈즈 전집을 덜컥 사기에 그러리라고 짐작하는 아내에게 이렇게 묻기도 하였다. 왓슨 박사의 이름이 조지인가?)
“... 그는 이야기를 발견하고, 연구하고, 계획을 세우고, 그런 다음 써내려간다. 그는 작가가 지녀야 할 책임감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갖추고 있다. 첫째, 지적일 것. 둘째, 재미있을 것. 셋째, 영리할 것. 그는 자신이 어떤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를 잘 알고, 결국에는 독자가 왕이라는 사실도 잘 안다...” (1권, p.392)
그렇게 소설을 읽기 전부터 갸우뚱하였지만 나는 이 두 권짜리 책을 읽느라 오랜만에 이틀 연속으로 해 뜨는 것을 보며 잠들어야 했다. 근래에 읽은 책들 중 가장 몰입도가 높았다고 해야 할까. 아서 코난 도일의 추리 소설들을 읽으면서 느껴야 하는 기분, 그러니까 한 번 잡으면 손에서 놓을 수 없는 그 장르적 특성을, 어쩌면 줄리언 반스는 자신의 소설에 그대로 도용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설은 그렇게 (소설 속 아서 코난 도일의 소설 작법을 서술한 것처럼) 지적이면서도 섬세한 문장들과 긴장감 속에서 재미를 놓치지 않는 서사, 그리고 영리하기 그지없는 형식을 띠고 있는 것이다.
“작업에 착수하면서 아서는 친근한 감정을 느꼈다. 새 책을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하나의 이야기를 생각해냈지만 아직 그것이 완벽하게 구성되지 않았을 때의 기분, 대부분의 인물들을 생각해냈지만 아직 그들이 완전하게 다듬어지지 않았을 때의 기분, 이야기의 연결고리들이 전부 다 만들어지지 않았을 때의 기분이었다. 아서에게 이야기의 시작과 결말은 결정되어 있었다...” (2권, p.67)
소설은 모두 네 개의 챕터로 되어 있다. 제1장 시작들로 시작해서 2장인 결말을 동반한 시작, 3장인 시작이 있는 결말, 4장인 결말들로 이어진다. 그리고 1장과 2장을 읽을 때까지 독자들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도대체 왜 아서 코난 도일의 일대기를 소설 형식으로 쓰는데 조지, 라는 남자가 필요한 것이람... 그리고 드디어 3장이 되어서야 (소설은 두 권으로 나뉘어 출간되었는데 3장은 두 번째 권이 되어야 시작된다) 아서 코난 도일과 조지 에들린이 만나게 된다. 아서 코난 도일은 (1장과 2장을 통해) 어린 시절과 안과 의사 시절을 거쳐 탐정 소설로 명성을 얻었으나 첫 번째 아내인 투이가 십여년의 병상 생활 끝에 숨을 거둔 후이고, 조지 에들린 또한 (1장과 2장을 통해) 인도계 영국인임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노력 끝에 변호사가 되었으나 오래 전부터 그들 가족을 괴롭힌 익명의 편지와 가축 살해라는 사건이 묘하게 겹치면서 삼 년이라는 무고한 옥살이를 끝낸 후이다.
“조지, 전 당신과 관련된 기사를 읽었고, 이제 당신을 만났습니다. 제 대답은 이렇습니다. 전 당신이 무죄라고 생각하거나 믿는 게 아닙니다. 전 당신이 무죄라는 것을 압니다.” (2권, p.31)
소설의 1장과 2장이 두 사람의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을 따로따로 다루고 있다면 (1장과 2장까지 소설은 철저하게 아서와 조지, 두 사람의 시점으로 나뉘어서 진행된다) 3장에서는 조지가 겪은 사건을 코난 도일이 해결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그 사건 해결의 과정이 지적 유희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조지가 겪는 사건은 미스터리한 것이기는 하지만 정교하게 조작된 것은 아니다. 또한 그 사건의 해결이 어떤 통쾌함을 제공하지도 않는데, 조지는 사건의 피해자이면서도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는 동안 담담해 보이기만 한다. 사실 하는 고초의 대부분은 말도 안 되는 것이며, 1장과 2장을 읽는 내내 독자는 안타까운 감정도 억울한 감정도 넘어서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데, 어쩌면 이 또한 바로 이러한 조지의 캐릭터로부터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요소가 소설의 전반부를 읽는 동안 독자의 오장육부를 간질간질하도록 만들기도 하는데 그것이 꽤나 자극적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을 기하학적으로, 삼각형의 중심에 자리한 존재로 생각한다. 삼각형의 세 꼭짓점은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세 명의 여인들을 가리킨다. 세 변은 의무를 상징한다. 그는 당연히 진을 꼭대기에, 투이와 엄마를 아랫변 양 꼭짓점에 놓는다. 하지만 가끔 삼각형이 그를 중심으로 회전하는 듯 보인다. 그러면 그의 머리도 돌기 시작한다.” (1권, p.361)
조지가 겪는 일련의 사건과 함께 독자들을 소설에 몰두하게 만드는 또 한 줄기는 코난 도일에게 찾아온 두 번째 사랑에 대한 것이다. 첫 번째 부인이 (당시로서는 불치병에 가까웠던) 폐결핵에 걸린 이후, 어려운 시기에 찾아온 새로운 사랑으로 인해 겪는 코난 도일의 윤리적 혼란이 조지의 미스터리한 사건과 동시에 진행된다. 소설은 이처럼 이런저런 형식적 장치들 뿐만 아니라 개인의 윤리적 고민 그리고 다양한 사회적 메시지들까지도 제시함으로써 어느 한 편으로도 소홀함이 없다. 조지의 억울한 옥살이와 코난 도일의 집요한 대응은 결국 영국 법원이 이후 단심제를 벗어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고, 사회적 편견에 대응하는 당사자의 의연하기만 한 태도는 그 사회적 편견 자체를 무력화시키고 만다.
“... 그에게는 이상한 종류의 명성이 있었다. 비록 온전한 명성이라고는 할 수 없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처음의 명성도 줄어들고 있었지만, 그의 희망과는 달리 그는 변호사로서가 아니라 불의의 희생자로 더 널리 알려져 있었고, 그의 사건은 상고법원의 설립으로까지 이어졌다... 조지는 비록 그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이 일에 자신이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누가 이를 알아줄까? ...” (2권, p.252)
내용과 형식, 지적인 유희와 독서의 재미, 본격 소설의 만족감과 장르 소설의 즐거움... 어찌 보면 이들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둘 중 어느 한 쪽을 포기해도 어쩔 수 없어, 라고 여기기 일쑤인 독서 양태에 반기를 드는 것만 같은 소설이다. 이처럼 풍요로운 소설과 만나는 일은 흔치 않다. 십여 년 전 《10 1/2장으로 쓴 세계 역사》을 읽은 이후 (사실 그 소설을 읽는 동안 머리가 지끈거렸고 이후 이 작가로부터 멀어졌다) 줄리언 반스의 소설을 무척 오랜만에 다시 읽은 셈인데, 어쩌면 이번 소설을 기점으로 삼아 그 사이 번역 출간된 그의 작품들을 고루 살펴보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