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희망'이라는 선물

하지만, 행동이 먼저다

by 송면규 칼럼니스트

"신은 인간에게 '희망'이라는 선물을 주었다." 이 말에는 두 가지 진실이 담겨 있다.


하나는, 인간은 언젠가 좋아질 거라는 미래를 기대하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 다른 하나는 그 '희망'이 단순한 기대나 기도만으로는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희망은 행동을 전제할 때 비로소 삶을 움직이는 진짜 힘이 된다. 그렇다면 희망은 대체 뭘까?


첫째, 희망은 위로일까, 동력일까?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 "희망을 가지라"는 말은 위로가 되지만, 때로는 공허한 말로 들릴 수 있다. 왜냐하면, 희망이 현실을 바꾸지 못하는 한, 그것은 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희망을 '감정'이 아닌 '동력'으로 이해할 때 이야기는 달라진다. 희망이란 그저 좋은 일이 일어나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좋은 일이 일어나도록 내가 무언가를 하는 것, 그 자체다. 희망은 미래의 가능성을 현재의 행동으로 당겨오는 과정이다. 달리 말하면, 희망은 "움직이는 믿음"이다.


둘째, 희망은 기다림이 아니다.


희망이라는 말에는 종종 착각이 따라온다. "기다리면 언젠가 좋은 일이 생기겠지." 그러나 그런 희망은 현실을 마비시키고 책임을 유예시킨다.


해서, 희망을 믿는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건 희망이 아니라 망상이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판도라의 상자에 남은 마지막 한 가지가 '희망'이었다는 것은 상징적이다. 온갖 재앙이 풀려나간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위안.


하지만 그 희망조차, 우리가 붙잡고 움직이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희망은 인간을 수동적으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희망이 있는 사람은 더 치열하게 산다. 왜냐하면 바꿀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셋째, 희망은 책임이다.


진짜 희망은 책임을 동반한다. 내일이 달라지길 바란다면, 오늘 내가 달라져야 한다. 환경이 바뀌기를 기대하면서 나 자신은 제자리라면, 희망은 도달하지 못할 신기루에 그친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더 나은 공동체, 더 정의로운 질서, 더 평등한 기회를 바란다면, 우리는 그 희망을 말로만 품을 것이 아니라, 그것을 위한 실천의 자리에 서야 한다.


시민의 희망은 투표에서, 자녀의 미래에 대한 희망은 오늘의 교육에 대한 관심에서, 더 나은 인간관계에 대한 희망은 지금의 용서와 이해에서 시작된다.


넷째, 희망은 결국 '지금'의 선택이다.


희망은 미래를 향한 단어지만, 그 뿌리는 철저히 '지금'에 있다. 아무리 먼 꿈일지라도, 오늘 내가 내딛는 작은 발걸음이 그 꿈과 연결되어 있다면, 그것은 희망이 된다. 그렇지 않다면 희망은 그냥 포장지뿐인 상상이다.


우리가 삶을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하루를 살아내는 이유, 좌절 속에서도 다시 고개를 드는 이유, 그것이 바로 희망이다.


그러나 이 희망이 진짜 힘이 되기 위해서는, 나의 손과 발이 움직여야 한다. 침묵 속의 기도만으로는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 말하지 않으면 전해지지 않고, 행동하지 않으면 이뤄지지 않는다.


희망은 우리에게 주어진 위대한 선물이다. 그러나 그 선물은 가만히 보관하는 것으로는 의미를 갖지 못한다.


꺼내 쓰고, 일상 속에서 꺾이고, 다시 붙들며 앞으로 나아가야 비로소 진짜 선물이 된다. 신은 희망을 주었고, 인간은 그것을 실현할 책임이 있다.


희망은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서 걸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한 걸음이 모여, 결국 우리가 바라던 세상을 만든다.


◇ 참고 : 조금 더 '희망'에 관한 내용에 관심이 있는 분은 필자가 집필한 에세이 '희망'을 교보문고 등에서 e-Book으로 만나실 수 있습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국민의힘, "창조적 파괴가 답" 일까?